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될 때

by 다정




어느 날 오후, 느지막이 짐을 챙겨 강릉으로 떠났다. 무작정 갔다. 안목 해변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다행히 방이 남아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더 늦은 밤까지 내내 울었다.


울면서 잠들고 깨어나 다시 울고 걸으면서 울었다. 울고 울고 울다가 낯선 이를 만나면 웃었다. 휴가철도 아닌데 서울분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는 차마 애인한테 차이고 힘들어서 왔다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바람 쐬러 바다 보러 왔다고 말하며 웃었다. 너무 좋죠? 하는 말에는 그냥 네 좋네요 했다.


내내 울면서도 배고프면 맛집을 찾았다. 걷다가 길 한가운데 우뚝 서서 해변에 있는 수많은 식당 중 물회가 가장 맛있다는 곳을 20분 동안 검색했고, 맨 끝에 있다는 횟집까지 기꺼이 걸어갔다. 애인이 떠난 후 내게 남은 건 그리움과 그리워할 시간뿐이었으므로 그 시간을 다른 데에 쓰는 연습을 해야 했다.


블로그 리뷰처럼 물회는 맛있었던 것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아무 맛이 나지 않는 음식이었다.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먹으려고 열심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다른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산토리니에 들어갔다. 흰 건물에 파란 지붕의 카페였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면서 쿠폰 찍어드려요? 하는 점원의 말에 네 했다.


선반에 꽂혀 있는 책 하나를 골라 들고 맨 꼭대기 층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일어선 채로 바다가 보였는데 앉아서도 보였다. 바람은 시원하고 바다는 맑고 파도 소리는 컸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그러니까 나를 잔뜩 울고 웃게 하는 바닷속에서 나는 다섯 시간을 넘게 꼬박 앉아 열 장이 넘는 편지를 쓰고 책 한 권을 필사했다. 내가 무언가를 진득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그때 알았다. 물론 죽을 만큼 처절해야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둘째 날 머문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상한 남자 둘을 만났다. 자꾸 나를 불러내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애인이 기적처럼 나타났다.


"가자."


나를 체념의 고통과 두려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줄 구원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우린 손을 잡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오직 서로밖에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나는 처음에 안도했으나 이내 불안해졌다. 그가 나를 구원하러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경직된 표정으로 단지 내 손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나머지 3일을 보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결국 그에게서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끝내 울음이 터져 버렸을 때, 그가 나를 안았다. 그는 내가 그의 구원이었다고, 그런 내게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얼굴을 보고 말았을 때, 이 선택을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잠시 멀어져 있고 싶었지만 당신을 떠날 수는 없어서 그랬다고 사과했다. 우리는 서로의 품에서 한참을 안도하고 안식했다.


마침표로 끝날 줄 알았던 여행이 결국은 쉼표로 남아서 다행이라는 결론이었다.


생애 가장 외롭고 그리웠던 5일의 여행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으로 남았던, 가장 싫고 가장 좋았던,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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