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by 다정



소위 ‘재수가 옴 붙었다’고 말할 만한 날이 있다. 금요일이었던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오후에 인터뷰가 잡혀서 오전에 주간 업무를 모두 끝내 놔야 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예상되는 날이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나의 친절한 선임께서 다음 주까지 하라던 프리뷰를 갑자기 오전 내로 끝내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까라면 까야 하는 직장인은 결국 오전 내내 프리뷰에만 매달렸고 주간 업무 마무리는 고스란히 주말 업무로 넘어갔다. 아주 짜증 나는 상황이었지만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 하나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갔다.


오후 인터뷰는 다행히 금방 끝났다. 우리 팀은 인터뷰가 일찍 끝나면 바로 퇴근하라며 인터뷰 장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주곤 했다.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나서 집에 빨리 가겠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팀장님이 어디에서 내려주겠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게 아닌가. 이대로라면 회사로 복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초짜 신입인 내가 먼저 내려서 가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물쭈물하다 결국 회사로 복귀했고, 시간을 보니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아 있었다. 정시 퇴근 야근 지양 문화였지만 복귀한 후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는 게 왠지 눈치 보여 결국 오전에 하지 못한 업무를 다 끝내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일주일 치 피곤이 잔뜩 쌓인 금요일이라 퇴근길 버스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 한참 후 잠에서 깼는데 왠지 개운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대중교통 안에서 잠깐 졸다 깼을 때 개운하면 망한 것임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불안한 마음에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는 것도 일단 제쳐 두고 정신없이 내렸다. 내려야 하는 곳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친 정류장이었다. 그날 여기 근처에서 약속이 있긴 했지만, 그건 집에 들러 짐을 놓고 저녁을 먹고 나온 후여야 했다. 약속 장소에 밥도 굶은 채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린 거다. 일정이 잔뜩 꼬였다. 평소에도 정류장을 자주 지나쳐 내리곤 하니 별거 아닌 일로 여기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어휴-!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다시 건널목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에 다녀오기에는 이미 애매해진 시간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배라도 채워야겠다 싶어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요기할 만한 음식 칸이 싹 다 비어 있었다. 장사가 너무 잘 되나 보다, 그럼 나 한 시간 동안 뭐 하지, 하며 외로운 기분에 빠졌다가 건너편 빵집을 생각해 냈다. 거기에는 다행히 온갖 종류의 빵과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나마 외로웠던 기분을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빵들이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와플과 크로켓을 골라 계산대 앞으로 갔다. 커피도 함께 주문하며 와플을 좀 데워 줄 수 있느냐 물었고, 계산이 끝난 후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에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빵집 사장은 내가 질문할 때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주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기 전자레인지, 알아서 데워 드세요. 화장실 건물 안쪽에요. 영수증 보세요.


귀찮은 질문만 던지는 귀찮은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마음이 잔뜩 엉켜버렸다.



약속을 마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타야 하는 버스가 오고 있길래 정류장 쪽으로 급히 뛰어가 손을 뻗었다. 어두워서 나를 못 보는 건가 싶어서 조금 앞으로 나가 양손을 뻗어 휘휘 내젓고 있는데 버스는 가까워져도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이러다 저 돌진해 오는 차에 치여 튕겨 나가 온몸이 박살 나겠다는 생각에 바로 몸을 피했다. 버스는 그대로 쌩 지나갔다.


아씨, 나한테 다 왜 이래!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다. 그다음에 오는 버스는 20분 후. 이왕 이렇게 된 거 속도 타는데 다음 버스 타기 전 음료수나 마셔야겠다 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외진 곳이라 길목이 어두컴컴했다. 물컹 하고 무언가 묵직하고 찐득한 게 밟혔다. 주위에 지하철 공사 중이라 진흙이 많았으니까 진흙이겠지, 그러기엔 너무 물컹했지만 그래도 진흙이겠지, 설마 오늘 계속 이렇게 재수가 없었는데 진흙이겠지, 진흙이어야만 해, 진흙일 거야 생각하며 플래시를 비췄다.


하하, 똥이었다. 똥!



드디어 오늘의 피날레를 장식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진흙이어야만 하는 그것은 똥이었다. 아주 물컹하고 찐득하고 미끈거리는 어떤 것, 사이즈 큰 강아지가 저질러 놓았을 무언가, 저 물건의 주인이 틀림없이 속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것. 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밟을 때마다 계속 물컹물컹. 아주 제대로 밟아서 신발 바닥에 다 묻었다는 소리다.


아, 씨, 아! 아… 아……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친 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바닥은 계속 물컹거렸다. 일단 닦아내야 했다. 정류장 근처에 쓰레기통을 대신해 있던 포대 자루를 발견하고 그걸로 신발을 닦았다.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닦았다. 그러다 보니 버스 도착 시간이 다 됐다. 이번 버스도 놓치면 또 20분을 기다려야 하니까 우선은 다시 탈 준비를 하는데 마치 내 몸 전체가 똥통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포대 자루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열심히 똥 묻은 신발을 닦다 보니 손에까지 냄새가 다 밴 탓이었다.


버스에 탄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이 기분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감당하다가 찾아올 외로움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고 무심하려고 애쓰다가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효정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있던 일들을 대충 설명하고는 투정을 부렸다.


“하, 엄마. 나는 정말 노답인 인간이야. 되는 일이 없네. 오늘 대박 완전 망했어.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없을 수 있어? 아니, 다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어떻게 똥까지 밟냐고! 대체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테스 형에게 묻는 나훈아 아저씨처럼 세상이 왜 이따구냐며 투덜대는 내게 효정은 말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해. 안 된다, 망했다 하면 더 그렇게 되어가는 거야. 나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어. 네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곤 생각을 못 했네. 이런 일쯤은 우스운 해프닝으로 넘기고 오히려 이런 일 있었다고 웃으면서 얘기하는 사람일 줄 알았어.”





그날 종일 내게 벌어졌던 일보다 효정의 이 한마디가 더 놀라웠다. 그간 나는 스스로를 꽤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날도 그랬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누구보다 날 사랑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워 매일 나를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효정에게 내가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다니. 나는 회사에선 이리저리 눈치 보는 새내기 인턴, 버스 안에서는 피곤에 찌들어 머리를 왔다 갔다 하며 꾸벅꾸벅 조는 직장인, 결국 똥까지 밟아버리곤 세상이 왜 이러냐며 한탄하는 바보가 아니던가. 내가 이걸 전부 해프닝이란 언어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효정에게조차 이렇게 간극이 큰 나였다. 누군가에겐 낙관적인 사람, 스스로에게는 비관적인 사람. 그러니까,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헤매는 사람. 그렇다면 똥을 밟은 게 아니라 똥물을 맞아도 비관과 낙관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 아니던가. 비관이 반드시 나쁘고 낙관이 반드시 좋은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좋고 내가 싫은 마음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방랑할 것이다. 다만 세상이 왜 이러냐고 테스 형에게 묻기 전에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 형의 말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똥이 주는 교훈이 이렇게나 크고도 심오하다니. 고마워, 똥아. 그래도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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