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야.
요즘 우리 대화는 항상 이런 주제네. 너무 맹목적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거 좀 지치는 일인 것 같다는 얘기 자주 하잖아. 네 말에 크게 공감했어. 그저 적당히 건강한 마음으로, 적당히 알뜰살뜰하게, 적당히 곁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며, 적당히 근면 성실하게, 큰 욕심이나 피해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 네가 정의한 이 '보통의 삶', 정말 어렵다. 대단한 부와 명예를 얻는 것만 그런 게 아니야.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만족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어쩌면 더 어려운 일 같기도 해.
어릴 때는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았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어. 남들이랑 너무 똑같은 것도 남들 사이에서 너무 튀는 것도 좋지 않다면서 늘 '적당히', '무난하게'를 외치는 사람들. 삶에 찌들어 매너리즘에 빠진 채 안정만 추구하는 사람들. 꿈과 희망과 통통 튀는 청춘의 에너지 같은 거 다 한때의 객기로만 취급해 버리는 고리타분한 사람들. 나는 절대로 저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호언장담하곤 했었어.
근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거 있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 모험적이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삶이 싫어. 한때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외국에 나가는 것조차 내겐 버겁고 벅찬 일이 되었어. 지금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최대한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움직이고만 싶은 거야.
때로 네가 물어보잖아. 음악은? 그럼 난 대답해. 해야지. 해야 하는데, 하고는 싶은데…. 그럼 너는 그렇구나 하고 말잖아. 나는 알아. 끝맺지 못한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너도 알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말아줬다는 걸.
그러고 싶어. 음악을 하고 싶어. 음악 하면서, 그러니까 음악으로 벌어먹고 살고 싶어. 음악만 할 수 있다면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소리치던 때가 나한테도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조금 무서워. 서른을 코앞에 둔 내가 다 포기하고 꿈이라는 오글거리고 비현실적인 단어에만 매달려도 괜찮을지. 그래도 되는 것일지.
서로 근황도 잘 모른 채 지내다가 몇 년 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나, 나를 아껴 주는 몇몇 사람들이 가끔 안부를 물어올 때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아, 저 지금 일 안 다녀요. 공부해요. 했을 때 느껴지는 누군가의 안쓰러운 눈빛과 때로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한숨들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내 인생에 내가 당당해야만 하냐고? 그러지 않아도 되겠지, 뭐. 근데 왠지 나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적어도 내 삶에 대해서는 당당해야, 자신이 있어야 내 인생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불쌍해질 것 같은 마음이야.
부모에게조차 내 인생은 실패했고, 보잘것없고, 이미 망했다는 이야기를 늘상 듣고 사는 나는, 나에게 자신이 없어. 그래서 도전을 선택하는 게 쉽사리 잘 안될 것 같아. 좀 어려울 것 같아. 포기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좀 두렵다는 얘기를, 내디뎌야 하는 한 걸음이 너무 무겁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 그래도 가장 사랑하는 것이니까, 죽을 때까지 음악을 포기하게 되진 않을 거야.
이렇게 적고 나니 나한테 필요한 게 뭔지 딱 알겠다. 난 겁쟁이였네. 용기를 낼 용기조차 없는. 나에겐 상황의 안정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던 거야. 나를 자꾸 무너트리는 말들이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하게 할 만큼 내가 나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거야.
네가 공부를 위해 그곳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왠지 좀 다른 사람 같았어. 아무리 여러 주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해도 결국 네가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다 죽었어!' 이런 말만 되풀이하는 느낌이었거든. 지금 좀 한풀 꺾인 네 모습이 나는 오히려 보기 좋아. 어쩌면 남들이 중요하다고 부르짖는 것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 네 말처럼, 이 세상이나 사회는 그리 훌륭한 표지판이 아닐 수 있어.
우리,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사람들을 열심히 사랑하면서 다정한 일상을 꾸려나가자.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차근차근 살아내 보자.
언젠가 우리도 늙고 병들겠지만, 나는 그때도 내 왼쪽 팔 타투를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귀에 달린 다섯 개의 피어싱을 당당히 자랑하는 멋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야.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 '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이라는 제목이야.
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
더 이상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그저 내 키만 한 소파에 서로 기대어 앉아
과자나 까먹으며 TV 속 연예인에게 낄낄댈 수 있는 것
그냥 매일 손잡고 걸을 수 있는 여유로운 저녁이 있는 것
지친 하루의 끝마다 돌아와 꼭 함께하는 것
잠시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길 들어줄 수 있는 것
- 슌(Shoon), 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 中
(작사·작곡 슌(Shoon))
어때, 우리가 꿈꾸는 삶과 비슷한 것 같지. 오늘은 시구절 대신 이 노래 가사를 보낼게. 우리 머지않은 날에 만나 술 한잔 기울이면서 어른인 척 이런저런 이야기 더 깊게 나눠 보자. 그날은 네가 너무 많이 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인지는 알지? 지금 여긴 오후 3시 30분인데, 네가 있는 그곳은 밤 열두 시겠구나. 좋은 꿈 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