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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11. 2024

은밀한 611호




남편은 차유진과 함께 지낼 레지던스를 3개월 월세로 임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아지트’라고 불렀다.     

나는 남편을 잘 안다. 23년을 함께 했으니, 적어도 그 세월만큼은 안다고 믿는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다. 하루하루 제 지갑에서 나가는 모텔 대실비가 아까웠으리라. 적당한 비용의 월세를 얻는 방향이 여러모로 이득이라는 결론을 냈으리라.     


나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이 문제가 되겠냐 물었다. 변호사는 “법적 배우자의 명의로 계약된 집에 들어가는 건 주거 침입에 해당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오전 10시. 나는 그들의 아지트가 있는 영등포로 향했다. 레지던스 건물로 들어서기 전, 혜진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남편의 매장과 학원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그들이 출근을 했는지 미리 확인해 달라 부탁했다.


“이서야, 확인 다 했어. 하온이 아빠는 매장에 출근했고, 그년은 학원에 있더라. 지가 원장이래. 제 학원 다됐어. 여하튼, 그 집은 비어있는 게 분명해.”


나는 전화를 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해 보이는 건물은 레지던스라는 간판이 무색할 만큼 경비도 관리도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철문이 줄지어진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자락 회청색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611호.


나는 문에 붙은 세 자리 숫자를 보며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잠시 숨을 가누었다.

손끝이 허공에서 바르르 떨려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도어 록 비밀번호를 추측해 보았다. 남편의 생일과 차유진의 생일을 붙여 여덟 자리 숫자를 만들어 눌렀다. 틀렸다.


‘내가 박현우라면 어떤 숫자를 먼저 떠올렸을까.’

머릿속으로 숫자를 짚어가며 번호판을 다시 한번 눌렀다.     


2.1.0.5.2.9.*     


삐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일순,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5월 29일. 그날은 남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날, 그가 나를 배신하고 차유진과 처음으로 몸을 섞은 날이었다.     


문을 열고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센서등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한 발 더 들어섰다. 신발을 벗어줄 만큼 그들에게 예의 따위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 바닥과 이어지는 자그마한 싱크대, 싱크대를 마주한 신발장과 화장실, 화장실 앞으로 놓여있는 침대가 한 시야에 보였다.

대여섯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아지트라는 그곳은 남편과 차유진이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던 모텔방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소롭고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절로 났다. 허탈감이 무거운 공기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현관을 지나 거실인지 침실인지 모를 곳으로 두 걸음 더 들어서자 침대 위로 널브러진 그들의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뜨거운 충동이 일었으나 간신히 그 마음을 진정시켜 눌러 삼켰다. 불쾌하고 역겨워 속이 울렁였다. 토하기 직전처럼 목이 조여들면서 헛구역질이 났다.

최악이었다. 기분도. 상황도.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스른 뒤, 그들의 더러운 침대 아래 녹음기를 숨겼다. 증거로 쓸 만한 것들은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은밀한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마주한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의식 상태로 운전을 하고 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으로 올라와 현관문 앞에 섰다. 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우리 집 도어 록 비밀번호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황당하고 혼란스러웠다.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한참 동안 멍하니 내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하루하루 엉망이 되어가는 내 신세가 서글프고 비참했다. 더하여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만든 남편을 향한 분노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한여름인데도 한기가 서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내리뜬 눈꺼풀에서는 경련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집에 들어가고 싶어... 제발...”


나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손잡이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꾹꾹 눌러 둔 울음이 기어코 터져 나와 현관 앞 좁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 줄을 놓친 듯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내가 이제 슬슬 미쳐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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