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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12. 2024

20년 전, 그 유진이?




남편이 집을 나간 지 두 주 이틀이 지났다. 해결사는 불시에 차유진을 찾아가 엄포를 놓으라 말했다. 아내의 실행력을 보여주라 조언했다.


겁이 났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돌아오게 될까 걱정이 됐다. 그녀 앞에서 눈물부터 왈칵 쏟아져 초라하고 나약하게 보일까 두려웠다.

그러나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만나야 한다는 마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그러다 만나야 한다는 마음이 이겼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간 모아놓은 증거 몇 가지와 차유진에게 받아 내야 할 각서를 출력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순간,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혜진이었다.


“1층이야. 내려와. 너 혼자 못 보내겠어.”

“어디? 우리 집?”


되묻고 나자, 어젯밤 혜진과 했던 통화가 불현듯 기억났다. 나는 차유진을 만나는 게 맞는지 물었고, 혜진은 당연하다고 답했다.


아파트 입구에 하얀 벤츠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 혜진은 내게 우황청심환부터 들이밀었다.


“병신같이 떨지 말고, 경고만 해. 덜덜 떨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야.”


혜진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벤츠를 출발시켰다. 차유진의 학원이 될지 모를 남편의 학원 앞에 도착해서야 혜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학원까지 같이 올라가 줄까 물었고, 나는 혼자 가겠다고 답했다.


“귀싸대기를 갈겨버려! 도둑년!”


차에서 내려 돌아서는 등 뒤로 혜진의 마지막 한마디가 여운처럼 맴돌았다.


“도둑년. 도둑년. 도둑년...”     




학원에 들어서기 전,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비행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데스크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남편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은 많아 보여 순간 잘못짚은 건가 싶었다. 그녀가 신고 있는 뉴발란스 운동화에 내 시선이 멈췄고, 일순 멍했다.


서너 달 전, 남편은 내게 커플 운동화로 신자며 검은색 뉴발란스 327을 골라 들었다. 나는 신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거절했고, 그는 혼자라도 신겠다 했었다. 그 운동화가 내 눈앞 다른 여자의 발에 신겨있었다. 기가 찼다. 갑자기 심박수가 급격하게 올랐다.


“차유진 씨 되시죠?”


태연하게 마주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시선에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누구시죠?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나의 질문에 그녀 또한 질문으로 답해왔다. 앞의 ‘누구시죠?’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뒤의 질문은 내가 네 남편과 외도 중인 걸 ‘어떻게’ 알았냐 묻는 것인지, 내가 네 남편 학원에 들어앉아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 묻는 것인지,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답을 줄 수 없었다. 대신 차유진의 귓전에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가 듣고 싶지 않았을 대답으로.


“쪽팔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따라 나와.”     


차유진과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 조용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시선을 미끄러뜨려 그녀를 찬찬히 훑어 내렸다. 어깨까지 떨어지는 노랗고 푸석한 웨이브 머리, 주름진 피부와 뭉친 마스카라, 생기 없는 눈빛과 그늘이 짙은 눈동자, 진회색의 무지 티셔츠에 검정 슬랙스, 그리고 뉴발란스 운동화.


의아했다. 한눈에 봐도 박현우 그가 좋아할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 눈동자가 품고 있는 불안함과 어두운 느낌이 기분 나빴다.

나는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유부녀가 유부남을 만나 살림까지 차렸네요? 무슨 생각이세요?”


차유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아집스러운 눈이 분명한 의사를 들어냈다. ‘나한테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

나는 다시 물었다. 네 남편은 네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있느냐고.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으로 그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난, 박현우와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네가 믿고 있는 그 남자는 유책 배우자이기에 이혼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꿈 깨고 정신 차리라고. 네가 여기서 멈춘다면 나 역시 더는 안 간다고.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정리할게요.” 했다.


“난, 차유진 씨를 믿을 수 없어요. 정리할 마음이라면 각서라도 쓰세요.”


미리 준비한 각서를 그녀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 그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이나 각서를 읽고 또 읽었다. 눈에 담겼던 불안이 표정 전체로 퍼져나갔다. 펜을 잡아 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각서를 받아 쥔 채 굼뜨게 구는 그녀 앞에서 나는 인내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천천히 읽어보고 저녁에 연락할게요.”


무려 이십 분이나 지나고 나온 그녀의 말이었다.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고작 여덟 줄도 안 되는 내용을 얼마나 더 천천히 읽겠다는 것인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차유진이 나를 등신 호구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하니?”

 

그녀를 향해 짧은 말이 나갔다. 이 교활한 여자가 무슨 거짓말인 들 못할까? 순간 정말로 귀싸대기를 갈길 뻔했다.


한참을 망설이고 버티던 차유진은 결국 삼십 분 만에 각서를 작성하고 하단에 서명 무인까지 하였다.

각서의 내용대로 박현우와 함께 지내는 레지던스에서 당장 짐을 빼고, 더 이상 그와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그녀는 자리를 떴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막장드라마 같은 상황을 겪어야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옆에 있었는지 모를 혜진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 게 어디서 까불어. 도둑년...”     




돌아오는 길, 혜진은 내게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한다며 갈비탕 한 그릇을 사주었다. 억지로라도 떠먹으라 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게워냈다. 위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명치에 경련이 일었다. 배를 감싸 쥐고 침대 위로 쓰러져 누웠다. 동시에 휴대전화 벨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기 무섭게 남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너, 거기가 어디라고 갔어?”


그의 목소리에 독이 가득 올라 차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기력이 바닥나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다. 다행히 나의 대답을 원하는 물음은 아닌 듯했다. 연달아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쏘아붙였다.

증거가 뭐냐. 너 사람 썼냐. 그거 불법인 거 모르냐. 한번 해보자는 거냐. 내가 만나는 여자가 그 애 하나인 줄 아느냐. 그 애를 정리한다 한들 내가 너에게 돌아갈 것 같으냐.


나를 향한 그의 분노가 쉴 틈 없이 수화기를 뚫고 터져 나왔다. 내게 상처가 될 말들을 서슴없이 뱉고 또 뱉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미 없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여댔다. 혹시 미친 건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이 들었다.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통화 내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수화기 저편에서 그가 목청을 높였다.


“상황 파악됐으면, 정리하고 들어와.”


나는 가까스로 겨우 소리를 끄집어내 답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던져버렸다. 긴 한숨이 나왔다. 골이 지끈지끈 쑤셨다. 정신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신경 안정제와 타이레놀 두 알을 함께 삼켰다. 어둡고 불쾌했던 차유진의 눈빛이 머릿속으로 몽롱하게 떠올랐다. 낯이 익은 눈빛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깜깜한 머릿속에서 돌연히 이십 년 전 어느 하루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차유진? 그때 그 유진이 언니?     




내가 열아홉 살이었던 해 겨울이었다. 남편은 내게 친한 누나를 소개해 주겠다 했다. 누나가 미대생이라 했고, 당시 실기 고사를 준비 중이었던 내게 분명 도움이 될 거라 말했다. 홍대의 사튀로스라는 카페에서 나는 그렇게 차유진을 처음 만났다.


“현우 얘 왜 만나요? 이 새끼 바람둥인데... 이서 씨가 아깝다.”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녀가 내게 던진 첫마디였다. 도움이 될 거라던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도움이 될 만한 대화는 시작도 해보지 못한 만남이었다.


기억났다.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던 그 눈빛.


박현우가 ‘유진이 누나’ 라 부르던,

이십 년 전, 차유진이었다.






(ver. 현우)는,
남편이 쓴 글을 토대로 합니다.


ver. 현우


“남편이 있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단 하루라도 편하게 자고 싶어.”


유진이 말했다. 나를 보는 눈빛엔 간절한 느낌마저 어려 있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집에 들어서면 답답함에 숨이 턱턱 막혔다. 매 순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렀다. 하루라도 빨리 아내의 불편한 시선을 벗어나 자유롭고 편하게 유진을 만나고 싶다 생각했다.


한 달 전, 유진은 내가 운영하는 학원의 관리를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그녀에겐 매거진 에디터라는 본업이 있었지만,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장이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일을 본인의 일처럼 여기는 유진의 맘이 고맙게 느껴졌다. 나도 그녀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네 남편과 나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 내가 방 구해줄게. 나와서 편하게 지내.”


나는 유진이 출근하고 있는 학원과 내가 출근하는 매장 중간쯤에 월세방을 계약했다. 모텔숙박비도 아끼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녀와 편하게 만날 수 있으니, 나에게도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곳을 아지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유진과 나는 아지트에서 함께 출근하고, 퇴근 후 그곳에서 만나는 일상을 반복했다.     


8월의 셋째 주 월요일, 그날도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유진에게 전화가 걸려 온 건 점심 무렵이었다.


“그 여자 왔더라?”

“그 여자라니, 누구?”

“네 와이프.”

“무슨 소리야, 우리 와이프가 어떻게 알고 와?”

“그걸 내가 알아? 야... 무섭더라?”

무섭다고 했지만, 유진의 목소리는 비아냥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뭐라는데?”


“상스럽게 욕하고, 협박했어. 나한테 레지던스에서 당장 짐 빼래. 학원에도 더 이상 나오지 말래. 각서까지 미리 준비해서 받아갔어! 다 알고 있던데?”


아내는 욕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도 ‘상스럽게’ 와는 꾀나 거리가 멀었다. 20년 넘게 내가 알던 내 아내는 적어도 그랬다. 유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내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단 알겠어. 끊어봐.”

“나 오늘 일하기 힘들 것 같아. 들어갈래.”

“그래, 그렇게 해. 아지트에 가 있던가.”     


내 걱정이 향하는 방향은 유진 쪽이 아니었다. 혹여나 이 상황이 학부모에게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이 온몸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일순간, 분노가 치밀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너, 거기가 어디라고 갔어?”


아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통화 내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답답함에 도리어 약이 올랐다. 나는 입을 딱 다문 아내의 속내가 신경 쓰였다. 내 목소리는 저절로 커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황 파악됐으면, 정리하고 들어 와.”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조곤조곤한 말투였으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갑고 냉정했다. ‘정리하고 들어 와’는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다. ‘정리하지 않거나,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봐라.’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들어가면 뭐가 달라져?”


나의 물음에 아내는 똑같은 답변을 내놨다.


“상황 파악됐으면, 정리하고 들어 와.”


이후,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치다시피 던져버렸다. 왠지 아내와의 힘겨루기에 지는 것 같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어 보였다. 내가 바라던 전개가 아니었다. 깊은 절망과 좌절감이 목을 조였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른 퇴근을 하고 아지트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유진이 없었다. 나와 통화를 마친 후 학원에서 나와, 이곳에 들르지 않은 채 그 길로 제집에 돌아간 것 같았다. 아지트에 남아있는 그녀의 짐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괜찮아?”

“일단 변호사부터 알아볼래.”

“걱정 마, 소송은 못할 거야. 돈도 없을 거고.”

“그 여자가 우리 집 남자한테 알리기라도 하면? 나, 남편이랑 이혼 꼭 해야 된단 말이야!”


유진은 지난 6월, 제 남편과 협의이혼을 접수했다. 현재는 숙려기간 중이고, 9월이면 이혼이 확정된다고 했다. 혹여나, 그전에 남편이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저와의 이혼이 틀어질까 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와이프가 네 남편을 어떻게 알고? 일단 내가 집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좀 볼게.”


“뭐? 집에 들어간다고? 왜? 아지트에서 내가 나왔으니 된 거 아냐? 네가 왜 그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여자랑 이혼 안 할 거야? 이혼한다며 거길 왜 들어가냐고! 안돼! 들어가지 마!”


유진이 벌컥 성을 냈다. 흥분한 듯 악을 쓰며 불만을 토해냈다. 아내를 계속 ‘그 여자’라 호칭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다.


“어차피 우리는 이제 맘 편히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나도 이혼을 하려면 상황부터 파악해야 될 거 아냐. 와이프랑 단판을 짓던지, 달래던지, 일단 들어가 봐야 알지!”


아내를 달래기 위해 집으로 가는 거라며 유진을 달래는 이 상황이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기가 찼다.

징징거리는 유진도,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도, 하나 같이 짜증스러웠다.


'아내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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