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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08. 2024

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거니?




“내일은 귀여운 네이비 스트라이프 속옷 입고 와.”

“웬일, 나 그거 입을라고 했는데.”

“입을 타이밍 같아서. 여친 속옷 좀 사줘야지, 내가! 좋은 걸로.”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칠 뻔했다.


일순간에 머리가 아뜩해 왔다. 막막하고 암담한 나머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한없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앉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할 터였다.


머릿속에서 두 개의 생각이 상충했다. ‘외도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며 남편을 설득해 보자’와 ‘모르는 척하며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뒤 그들을 응징하자’.

내 대답은 후자였다. 이 지랄 맞은 상황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은 힘을 끌어모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창문 밖에 아침이 와있었다. 나는 멍하니 빈 벽만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방문 너머로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를 향해 심드렁한 말투로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오늘도 늦어?”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목소리 위로 바늘이 뚫고 나왔다.


“일이 많아. 내가 쉬면 아르바이트라도 불러야 되고, 그럼 다 돈인대. 생각 좀 해라.”


남편의 머릿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 파렴치가 어이없어 도리어 헛웃음이 났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남편이 대단하다 싶었다. 나는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며 그를 향해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네, 잘 다녀와.”   




남편이 나가고 아이를 등교시킨 뒤, 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지할 곁이 필요했다. 나를 잡아 줄 내 편이 간절했다.


“혜진아...”


친구의 이름을 불러놓고,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왜 그래?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응, 하온이 아빠 여자 있더라. 설마설마했는데...”


“나쁜 놈. 더러운 새끼. 미치겠네, 정말! 넌? 이서야, 넌 괜찮아?”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실은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이제 어떡할 거야?”     


‘그러게. 나는 이제 어떡할까? 평생을 한 남자만 믿고 바라보며 살아왔던, 바보 같은 나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꾹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서야? 이서야? 너, 안 되겠다. 집에 있지 마.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나와!”          


혜진은 나를 보자마자 영양제 서너 알을 입에 넣어주었다. 내게 물 한잔을 쥐여주고 꿀꺽 삼키라 했다. 누구 좋으라고 다 죽어가냐 했다.

불륜 피해자들이 대처법을 공유한다는 카페 한 곳을 알려주며, 가입부터 하라고 했다. 아는 게 힘이라고 전략을 세워서 맞붙어야 하는 거라 했다.

카페지기가 ‘외도 해결사’라고. 상간 손해배상 소송에 능한 변호사도 소개해 주는 것 같더라. 했다. 같이 상담을 가보자고 했다.


혜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도 해결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하릴없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바람, 불륜, 외도, 이혼, 소송, 위자료, 양육권, 변호사’ 등의 단어를 조합해 검색을 하고 정보를 얻었다. 결국, 혜진이 알려준 카페도 가입했다.


‘세상에, 배우자의 외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카페의 여러 게시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저렸다.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다. 내게도 곧 닥칠 상황이 될 수 있다 생각하니 겁나고 두려웠다. 동아줄이 필요했다. 의심 반, 믿음 반의 마음으로 ‘외도 해결사’라는 카페지기와 상담 예약을 잡았다. 판단은 나중의 일로 미뤄두고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었다.          


“원장이라면, 직장 동료인가요?”


“아니요. 관계가 시작된 이후, 남편이 그 여자에게 학원장 자리를 맡기지 않았나 싶어요”


“상간녀가 먼저 제시했을 겁니다. 도와주는 척하면서. 내가 해보겠다. 속셈이 있는 거지.”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해결사가 다음말을 이었다.


“남편분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을 텐데요? 이유 없이 짜증을 낸다거나, 아내분을 향해 지적질을 한다거나, 본인의 신세 한탄을 한다거나.”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남편이 온라인 게임을 즐겨하는데, 혹시 게임하다 만난 여자 아닐까요?”


“두 달 만에 이혼까지 요구할 만큼 깊어진 걸로 봐서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여자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해결사는 상간녀만 떨어지면 해결된다고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포기하지 말고 버텨내라 했다. 증거가 충분하니 소송부터 가자며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해결사의 권유대로 남편의 여자 차유진을 상대로 한 상간자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변호사는 내가 가진 증거가 이미 충분하다 했지만, 나는 소송에 유리할 증거를 수집하고 또 수집했다. 이왕 시작하게 된 진흙탕 싸움.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번 제대로 해보자 싶은 마음이었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악을 쓰며 남편을 쫓아다녔다. 혐오와 원망이 뒤섞인 눈물을 줄줄 쏟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증거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나중엔 그들을 마주해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아, 바보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이제 와 그저 궁금하다.


미행을 하며 내가 마주한 남편과 차유진의 모습은 결코 다정해 보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매번 무언가에 쫓기는 듯 그늘지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온전히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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