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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04.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남편은 어제도 외박을 했다. 외박을 하지 않는 날에는 새벽이 돼서야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집 밖을 맴돌았다. 이상해 보이고 낯설어 보였다. 갑자기 고압적으로 돌변한 그의 태도가 이상했고, 나를 바라보는 서늘하고 매서운 그 눈빛이 낯설었다.


나는 남편의 일방적인 협의이혼 제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쾌하고 억울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내 가정을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오늘 저녁에 얘기 좀 하자.”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맞받았다. 늦을 거 같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가슴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침대로 엎어진 채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한 달 전, 친구 혜진이 했던 실없는 소리가 생각났다.


"이서야, 별일 없어? 어젯밤 꿈에 네 신랑이 나왔는데, 옆에 딴 년을 끼고 있더라."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혼란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불길한 직감이 몸을 조이며 압박해 오는 느낌이었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하고...’     




현관문에서 도어 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5분.

남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간 내 입이 멍청한 말을 와르르 쏟아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안방 문을 조용히 소리 죽여 닫았다. 동시에 그가 거실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욕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고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남편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 그의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홈 버튼을 누르자 여섯 개의 동그라미가 내게 암호를 입력하라 했다. 그와 나의 비밀번호는 아이의 생일이었다.     


1.3.1.0.1.0.     


‘틀렸어.’ 하듯 진동과 함께 휴대전화 화면이 도리질을 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암호가 바뀐 상태였다.

실체가 없던 직감에 정황이라는 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내 의심이 뒤따라왔다.     


새벽 5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불을 켜지 않고 벽을 더듬어가며 남편의 방까지 조심스레 다가갔다. 방문에 귀를 대고 안쪽 기척을 가만히 들어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잠든 모양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잡이를 내려 누른 채 방문을 앞으로 밀었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남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베개 아래로 화면이 켜진 그의 휴대전화가 눈에 보였다. 나는 방 안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의 휴대전화를 집어 올렸다. 잠들기 전까지 유튜브를 본 모양이었다. 자동차 튜닝과 관련된 동영상이 켜져 있었다. 화면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히 휴대전화를 챙겨 방을 나왔다.


나는 안방으로 돌아와 남편의 휴대전화를 살피기 시작했다. 유튜브 창을 끄고 통화 기록부터 확인했다. 반복되는 이름이 눈에 걸렸다.


‘차유진 원장님’


기억을 뒤져봤다. 남편의 학원에 그가 아닌 다른 원장이 있었던가. 없었다. 학원에는 부원장님과 상담실장님, 과목별 선생님들이 전부였다.


메신저 창을 열어 차유진 원장과의 대화를 찾았다.     


“남자친구, 안 졸려?”

“잘게, 여친도 자요.”

“자라는 게 아니고 피곤할까 봐.”     


머릿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정전이 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내 막막하고 무서운 절망이 먹구름처럼 내 안으로 밀려들었다.     


“잘 자.”

“응, 내 사랑도 잘 자.”

“내일은 귀여운 네이비 스트라이프 속옷 입고 와.”

“웬일, 나 그거 입을라고 했는데.”

“입을 타이밍 같아서. 여친 속옷 좀 사줘야지, 내가! 좋은 걸로.”     


시야가 흐릿해지며 눈자위에 눈물이 차올랐다. 초점이 흔들려 더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내리뜨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와중에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카메라 앱을 찾았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바람에 버튼조차 제대로 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겨우 증거를 남기고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세상이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절망 속에서 멈추지 않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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