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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05. 2024

13년 연애의 마침표를 찍다




9월의 셋째 주 토요일,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었지만, 학원에 간다는 거짓말을 던지고 집을 나섰다. 그때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 문자 알림이 울렸다.


“홍익문고 5시.”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약속은 4시였고, 우리는 오늘 영화를 보기로 했었다.

미희 언니는 자주 이런 식이었다.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모든 행동이 덜렁대고 털털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편하고 좋았다. 한 시간쯤 늦는 일은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고마운 일이었다.


“천천히 와, 책 읽고 있을게.”


나는 언니에게 답을 보내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토요일 오후, 신촌 홍익문고에는 책을 고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나는 시집 코너 앞에서 신간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벽시계의 바늘이 다섯 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언니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박노해 시집.”


미희 언니는 문득 내 앞에 펼쳐진 시집을 보더니 휙 끌어당겨 표지를 확인했다.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르게? 난 매일 똑같이 배가 고파. 일단 밥부터 먹자.”


나는 반쯤 체념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     


내가 치킨 스테이크 한 접시를 먹는 동안, 언니는 순식간에 두 접시를 해치웠다. 며칠 굶었나 싶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순간, 미희 언니의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폴더를 여는 동시에 건너편에서 내지르는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귀까지 전달되어 들려왔다.


“야! 손미희 너 왜 안 와? 어디야?”

“이 자식아 귀청 떨어지겠어. 작게 좀 말해! 내가 어딜 가야 되는데?”


눈치가 뻔했다. 언니만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오늘 모임이잖아. 너 또 깜빡했어?”


그랬다. 언니는 약속을 깜빡한 게 맞았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나 지금 동생이랑 같이 있어. 데리고 갈게.”


언니의 대답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땐, 입 모양으로 “싫어.” 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선 남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서야, 같이 가자. 너랑 딱 잘 어울리는 놈이 하나 있어.”


통화를 끝낸 언니가 자못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연애하라고? 언니, 나 내일모레 수능이야. 학원 들러 그림 좀 그리다 들어갈게. 걱정 마.”


나는 언니를 짧게 노려보며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잘 어울리는 놈이라니.’ 그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좋아, 그럼 인사만 하고 나올게. 영화 보러 가자.”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을 비우고 어쩔 수 없이 언니를 따라나섰다.

홍대의 저녁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 차 사위를 어둑하게 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우리는 홍대의 어느 호프집 룸에 마주하고 앉았다. 언니의 동창이라는 남자들 대여섯 명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동창이 죄다 남자뿐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천장 모서리에 달린 스피커에선 시끌시끌한 댄스 가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었다. 여러모로 어색했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맥주와 안줏거리가 테이블에 놓였다. 잔을 돌리며, 미희 언니가 내 옆에 앉은 제 동창을 향해 짐짓 놀려대듯 말했다.


“야! 박현우, 넌 오늘 이서 만날 걸 알고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온 거야?”


나는 하얀색 원피스에 레몬 빛 카디건을 걸친 내 모습을 먼저 살폈다. 이내 시선을 돌려 그의 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단정해 보이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 폴로니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 웃음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가슴이 두근 했다.


“당연하지, 우린 어제 미리 통화했어.”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미희 언니는 킬킬대며 웃었고, 나는 희미하게 웃음을 얼버무리며 엄한 음료수만 들이켰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가을밤이 제법 서늘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나는 뒤 따라 나온 박현우를 향해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내 어깨를 휙 감싸 안아 당기고는 제 우산을 펼쳐 들었다.


“택시 잡아줄게요, 비도 오는데 위험해.”


나는 어리둥절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갈까요?” 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비 오는 밤 약간 춥다 싶었는데, 그의 품이 따스하기까지 했다. 우산 위로 가을비가 끝도 없이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샤워를 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는데 휴대전화가 짧은 신호음을 한번 울렸다. 문자 메시지 알림이었다.     


14 바 6688


‘이게 뭐지?’


이어서 휴대전화 벨이 꼬리를 물었다.

‘이 밤중에 누가?’


“이서씨, 저 박현우예요, 잘 들어갔어요? 내가 택시 번호 문자로 보냈는데.”

“아, 네...”


나는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실로 의문스러웠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다음 주 추석 연휴에 뭐해요? 우리 데이트할까요? 오늘 미희랑 못 본 영화, 저랑 같이 봐요”


나는 어이가 없어 머뭇거렸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의 행동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라는 말이 따스하게 들렸다. 무심하고도 다정한 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왠지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열아홉 번째로 찾아온 9월 18일, 그 어느 순간이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잠을 깨웠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확인했다. 봄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오빠, 밖에 비 온다...”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도 비 왔었잖아. 결혼하는 날이라고 안 오면 섭섭하지.”


그는 이불속에서 한쪽 눈만 간신히 뜬 채, 잠 묻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보며 피- 하고 입을 삐죽였다.     


4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금요일 저녁, 어느새 비는 그치고 봄바람이 꽃향기를 품고 살랑였다. 만개한 벚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함박눈처럼 흩날렸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며 유리창에 비치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미카도실크 소재의 웨딩드레스와 진주로 장식된 티아라가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내 손을 잡아주는 그 역시 눈부시긴 마찬가지였다.


“예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웃음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목사님은 하객들의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주례를 설교처럼 길게 하셨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 시간이 길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천천히 머물고 싶었다. 오래오래 붙잡고 싶었다.

그와 나는 성경책 위에 손을 포개어 올리고, 평생을 서로만 바라보겠다 약속했다. 서로를 사랑하며 살겠다 서약했다.


친정엄마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눈물을 훔쳤고, 아빠는 아련한 눈으로 나를 한번 바라봤다, 천장을 한번 올려봤다를 노상 반복했다.


그렇게 우린 13년 연애 끝에 부부가 되었다.     




연애를 길게 했다지만, 신혼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친구처럼, 애인처럼, 부부처럼, 흘러가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특별히 로맨틱하다거나, 깨같이 고소한 향이 나는 신혼이라기보다,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다정하고 따스한 하루하루를 지냈다. 진정한 내 편이 생김에 감사하고 든든했다.


그 시절, 우리의 관계는 햇살 아래 빛나는 맑은 강물처럼 투명하고 평화로웠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고, 세상의 어떤 어둠도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날에도 그림자는 존재하듯, 우리 결혼 생활의 앞날에 시련의 그림자가 드리울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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