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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Feb 23. 2021

절망의 서점

TEXTIST PROJECT

 아내를 기다려야 할 일이 있어서 한 시간 가량 시간이 뜨게 됐다. 전염병의 여파로 카페의 모든 자리는 치워져 있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는 교보문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점에서는 짙은 디퓨저 향기가 났다. 에세이 '명함을 정리하며'에서 나는 교보문고 잠실점의 강한 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향기는 대형 서점에서 일률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기를 헤치며 경제/경영 코너를 지나 자연과학/물리/화학 코너에 섰다.


 우주의 신비는 무한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무한이 주는 경외감과 엄중함에 매료되어 여러 책들을 재미삼아 읽었다. 나의 출신과 전공은 이 분야의 극단에 서 있는 관계로, 나의 재미는 오롯이 재미 단계에 멈춰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분야가 나의 출신이거나 업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나 지루함으로까지 향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여전히 무한함의 신비는 어떤 책을 꺼내들어도 나의 재미까지 무한의 지평으로 이끈다. 

 우주를 탐독하는 서적들은 대부분 물리, 화학 서적과 함께있다. 대중적으로 익숙한 상대성이론이나 아인슈타인같은 키워드는 대체적으로 눈높이에 꽂혀있다. 손이 닿을락말락하는 위치나 무릎 아래 위치에는 슈뢰딩거부터 양자역학, 끈이론과 같은 키워드가 새겨져 있다. 빛이라는 단어도 여러 책에 보인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신비, 무한함의 근거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먼 곳을 보려하고 갈 수 있는 한 먼 곳을 가려 하는데, 그 불가능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가장 작은 물질들을 연구했다. 그들은 빛을 연구했고, 빛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어디까지 쪼개지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과연 삼라만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는 뭘까라는 질문은 곧 삼라만상은 얼마나 큰가로 귀결된다. 그들은 존재하는 가장 작은, 작다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작음을 연구함으로써, 세상의 가장 큰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 과정이 점철되어 눈 앞의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러 이론과 실험, 우주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가 옆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화 관련 책들이 빼곡하다. 그 옆과 옆옆 책꽂이에는 토익이나 오픽같은 영어 시험 서적들을 따로 모아뒀다. 말과 말하는 시험이 별개라는 사실이, 그리고 오히려 말보다 말하는 시험 서적이 훨씬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었다. 영어회화 책들이 꽂혀있는 열에서 무릎 아래 위치에는 읽기 쉬운 원서들이 있었다. 어린왕자나 톨스토이부터 악녀는 프라다를 입는다, 다빈치코드 같은 책들도 있었다. 해리포터 전집도 세트로 묶여 있다. 

 톨스토이를 꺼내들었다. 능숙하게 읽히진 않았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가장 앞장에 펼쳐진다. 돈을 못받고 기분이 좋지 않은 시몬, 벌거벗은 채로 버려져 있던 미하엘과의 만남, 그를 부축해서 집에 가자마자 아내에게 혼나는 시몬. 남편에게 화가 바짝 났지만 자비를 베푸는 마트리오네, 입이 무거운 미하엘에게 별다른 것을 묻지 않고 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시몬까지. 읽다가 다시 책을 덮고 자리를 옮겼다. 


 자기개발서 코너를 그대로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문학 코너에 멈춰서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봤던 책, 보고 싶었던 책, 보고 싶어진 책들이 공격적으로 눈에 쏟아졌다. 고전을 꺼내서 알던 부분도 다시 읽어보고, 신간의 앞 뒤 소개 문구를 읽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책장은 눈에 밟힘에도 슬그머니 피해다녔다. 마치 노스텔지어의 깃발 같은, 그런 작가들의 책장은 아무리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계속 눈에 걸렸다. 그러니깐 김훈이나 김영하 같은 그런 책들.

 끊임없이 그들의 책꽂이가 유혹한다. 결국 김영하의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몇 초 걸리지 않고 글 속에 빠져버린 나를 느꼈다. 이윽고 몰아치는 좌절감. 나는 이렇게 도무지 쓸 수 없을텐데, 난 이런 생각을 도무지 할 수 없을텐데 라는 생각이 책에서 눈을 멀리하는 순간부터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래서 그들의 책을 꺼내지 않으려 했다. 

 이미 한 번 맛본 경지의 글 맛을 느낀 이상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집에도 한 칸을 이미 채우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을 꺼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본문까지 읽기도 전, 프롤로그 제일 첫 문장.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내 좌절은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곳까지 깊어진다. 어떻게 저들은 텍스트를 저렇게 만들어 내는 것일까. 

 경지의 글들이 무차별적으로 눈에 들어오자 머릿 속에선 내 글이 그들의 글 옆에 나란히 선다. 그리고 숨김없이 비교되기 시작한다. 서점 바닥이 한 층 정도 아래로 꺼지는 것 같다.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일이 한 층 멀어진다. 문득 시계를 보니 아내가 도착할 때쯤이 됐다. 허겁지겁 읽던 문장의 뒷 부분을 머릿속으로 구겨넣고 책을 꽂았다. 꽂고 나오기 전, 문학코너의 책꽂이들을 한바퀴 둘러봤더니 명인들의 기세가 책꽂이 높이만큼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으로 쏟아진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힘겹게 서점 밖으로 나왔다. 문학 코너를 들르지 않았더라면 마음 편하게 이 디퓨저 냄새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불현듯 재밌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을 따라오는 또 다른 의문-과연 문학 코너를 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좋은 글쓴이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가 그들이 주는 범접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일텐데. 언제라도 그 좌절감은 뿌듯함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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