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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Feb 23. 2021

부재의 부재

TEXTIST PROJECT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미물은 그럴듯한 영문 명칭으로 붙여진 채 두 해를 넘기며 모든 공간을 뒤덮는다. 먹이사슬 피라미드 최상단에 위치한 인류는 다른 생물들에게 가혹했듯이 미물들을 처단하고 지배하려 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기에 미물은 인간이 잡으려 하는만큼 더 창궐했고, 인간과 인간을 통해 세를 키웠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이다.


 건강은 가혹하다. 건강은 부재를 통해서만 그 진정한 값어치를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젊을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인색하고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은 지대해진다. 건강의 부재에 대한 경험 여부는 대체적으로 나이에 비례하므로 자연스럽다. 


 평화도 가혹하다. 평화는 건강과 비슷하다. 신체의 건강은 사회의 평화에 대응되는 개념같다. 평화 또한 건강처럼 평화의 부재가 평화의 필요를 깨닫게 유도한다. 평화의 부재를 경험한 이들은 평화에 더욱 예민하다. 평화의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이들은 평화에 둔감하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갈등에 민감한 이유,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갈등에 무심한 이유다. 그저 막연하게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만 알 뿐 평화가 부재했을 때 당장의 생활에 어느정도로 힘든 상황이 닥치는지, 마찬가지로 평화의 부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 속한 나는 잘 알 수 없다.


 비참하게도 미물은 건강과 평화의 부재를 동시에 겪게 해주고 있다. 달에 발자국을 찍고, 지구 건너편과 화상 통화를 하며, 핵폭탄을 만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인류가 이 미물 앞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숫자를 세는 것 뿐이다. 그렇게 세어진 숫자를 아침마다 확인하며 과연 건강과 평화의 부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추측하고 희망한다. 미물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단순한 활동만 반복하지만 이조차 인류에겐 여전히 버거워서 아직 그들의 증상을 막는 수준으로만 건강의 부재와 평화의 부재를 최대한 지연시킬 뿐이다.

 2019라는 숫자 달력의 뒷장쯤 등장한 잔인한 미물은 보란듯이 2020년을 지배했다. 달에 발자국을 찍고, 지구 건너편과 화상 통화를 하고, 핵폭탄을 만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이들은 많은 것을 멈췄다. 그렇게 한 해의 삶이 너무 크게 바뀌었다. 2021이라는 숫자가 적힌 달력까지 펼치게 됐고, 여전히 인류는 정지해 있다.


 오래 걸리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항상 건강의 부재나 평화의 부재를 종료시켰음이 기록된다. 미물이 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도 한 때로 지나가겠지만, 부재를 경험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재를 학습한다. 이 시기를 경험한 이들은 건강과 평화의 소중함을 여실히 깨닫고, 그들의 부재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건강과 평화의 부재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전수할 것이다. 전수는 그 다음 세대로,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이렇게 인류는 건강과 평화의 부재가 부재할 수 있도록 한단계 성장하며 세대의 페이지를 넘긴다. 

 부재들의 경험이 유의미한 자산으로 축적되면, 부재를 경험하지 않고도 부재를 막고 지연시킬 수 있도록 인류는 성숙한다. 2021년에는 건강과 평화의 부재가 존재로 전환되고, 자산으로만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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