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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Feb 23. 2021

첫 장

TEXTIST PROJECT

 흰 노트에 펜이 닿는 순간부터 생각들은 뻗어나간다. 머리로 정리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출중하지 못한 사유로 항상 노트를 갖고 다닌다. 노트에는 각종 기억해야 할 일들부터 여러 계산의 흔적들, 급히 메모한 글의 영감들, 각종 낙서와 회사 일들까지 지저분하게 적힌다. 

 노트는 정리된 상태의 컨텐츠가 탑재되지 못한다. 그저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어딘가쯤에 걸쳐 있는 모든 생각들이 필요한 형태로 구구절절 기록된다. 정리 안 된 컨텐츠를 굳이 노트에 기록하는 이유는 이 정리 안 됨조차 증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한 노트의 상태와는 별개로, 이런 기록들은 나중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남들은 펼쳐보고 알아보지도 못할 글씨체로 기록된 단어들은 만족스러운 글로 탄생되기도 하고, 업무의 중요한 키가 되기도 한다. 

 어떤 정치인은 메모가 습관임을 스스로의 장점으로 어필하기도 했다. 조금 민망했다. 마치 추울 때 따뜻한 옷을 잘 챙겨입는다며 뿌듯해 하는 모습처럼 보였던 기억이다. 남 보라고 하는 일도, 내 뿌듯함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닌데 그조차 스스로의 장점이라면 얼마나 내세울게 없단 말인가. 


 그렇게 노트를 막 쓰다보니 어느새 작년이 되어버린 2020년의 노트가 너덜너덜하다. 

 한 때는 새 노트를 쓸 때면 그래도 깨끗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마음을 어느정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던 바람이었을 것이다. 이놈의 너저분함은 굳이 항상성을 발휘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항상 전년도 노트의 상태를 금새 따라간다. 땀에 젖고 잉크가 번지고, 여기저기 낙서와 얼룩이 묻으면서 쉬이 헌 노트가 된다. 


 나의 기록은 결과과 아닌 과정이다. 생각이 완료된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적는 일보다, 마구잡이로 적으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훨씬 많다. 흰 공간이 줄어들는 양과 발굴된 생각은 비례한다. 끊임없이 생각이 확장되면 그 페이지는 쉽게 더러워지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더러워진 페이지야말로 필요한 답에 가까워진다. 

 때로는 아무 생각도 없을 때, 뭔가 떠오르길 바라며 아무 글이나 쓰기도 한다. 돛 없는 배가 잔잔한 물결조차 없는 물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억지로 발버둥치는 노질. 효율은 떨어지지만 빈 종이로 두는 것보다는 대부분 나은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새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든다. 의도와 무방하게 노트는 결국 다시 지저분해질 것이다. 지저분해지는만큼 나 자신을 노트처럼 채워갈 수 있을까. 노트를 얼마나 채우고, 어떻게 채우고는 아무 의미 없다. 노트에 무언가 쓰면서 생각을 남기고 확장하려는 그 행동에 담긴 내 희망이 필요하다. 나는 올해도 계속 희망을 희망하고 확장을 갈망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트와 기록의 도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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