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Sep 09. 2021

서로 다른 두 조커에 대해(조커 리뷰 1편)

영화리뷰


 배우는 많다. 하지만 '진짜 미쳤다..'는 생각에, 씬을 반복해서 돌려보게 만드는 명배우는 많지 않다. 나는 '베테랑(2015)'이라는 영화를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영화관 상영이 내려가고 한참 뒤에서야 봤다.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신세계(2013)'의 '정청' 역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황정민 배우의 뒷 작품들을 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계의 정청은 도무지 머릿속에서 희미해지지 않는 캐릭터다. 


 오늘의 이야기인 '다크나이트(2008)'와 '조커(2019)'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아까 위에서 예로든 '베테랑'과 '신세계'는 같은 배우가 다른 캐릭터로 분한 사례라면, '다크나이트'와 '조커'는 다른 배우가 같은 캐릭터로 분한 사례 되시겠다. 하지만 위 사례와 비슷한 이유로 나는 조커(2019)의 관람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이제 하늘의 별이 된 히스 레저의 조커는 그만큼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캐릭터였다. 

 


 다크나이트가 2008년 개봉 영화였고, 조커(2019)가 2019년의 개봉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나에게는 히스 레저의 조커가 10년의 세월을 넘기면서까지 자극을 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조커(2019)가 수많은 호평을 이어가고, 황금사자상, 골든글로브 등등을 따낼 때도 단호하게 참았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지난 2021년 하반기가 되어서 결국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만나게 된다.


 아, 나는 왜 이리 어리석었던가. 조커를 영화관에서 봤더라면, 그 색감과 미쟝센, 그리고 탄탄하고 암울한 음향을 더욱 제대로 느꼈을 것을. 게다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관람한다는 사실이, '히스 레저의 조커를 희미하게 만드는건 아닐까'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음을. 숨막힐 정도의 무겁고 압도적인 작품을 결국 눈에 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히스 레저의 조커 



 다크나이트는 '배트맨'을 지칭하지만, 2008년의 이 영화에서 씬 스틸러는 단연 조커였다. 그렇다고 크리스찬 베일이 배트맨의 역할을 못했거나, 스토리상 배트맨이 미약했던 것이 아니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그 어마어마한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음악 사이에서 가장 압도적이었을 뿐이다. 가면을 벗으며 그로울링 섞인 목소리로 "..Stranger!"라며 처음 얼굴을 보인 장면, "따란-"하면서 연필을 사라지게 하는 장면, 무엇보다도 취조실에서 박수를 치는 장면까지.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는 배트맨의 정반대에서 혼란을 야기한다. 그리고 양극단에 서서 마주보고 있는 배트맨과 조커가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온갖 곳을 터트리고 망가트리며 역설한다. 히스 레저가 연기로 설명한 조커는 폭발하는 광기 그 자체와 같다. 손동작과 표정, 몸짓과 혓바닥까지, 캐릭터를 광기 그 자체로 표현하기 위해 영혼까지 동화된 듯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한편 조커라는 캐릭터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진 조커(2019)에서는 광기의 시작과 이유를 설명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암울하고 어둡다. 조커와 그의 어머니의 삶에 'happy'라는 단어는 1도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별칭이 '해피'인 조커의 삶과 대비된다. 게다가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이 아서의 직업이자 꿈이라는 점까지 모순덩어리다.


 결국 조커(2019)에서의 조커는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처럼 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 히스 레저의 조커와는 그 행태가 다르다. 원초적인 광기 자체를 표현한 히스 레저와는 다르게 절제된 춤사위와 표정이 장면을 압도한다. 분명 의도한 것이겠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분장에서는 눈가에서 화장이 눈물마냥 흘러내린다. 올라간 입가의 화장에도 불구하고 암울하고 분노한 표정이 광대 화장을 뚫고 나온다.  





 그래서 결국 정리하면, 호아킨 피닉스도, 히스 레저도 서로를 결코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뚜렷하게 공존한다. 히스 레저의 파괴적인 조커에서 느껴졌던 혼란과 기묘한 카타르시스는 호아킨 피닉스가 보여주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맛으로 남는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조커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나'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조커(2019)의 조커는 '세상이 조커를 어떻게 만들었나'에 초점을 맞춘다.


 조커(2019)에서의 사회적 분위기와 계층구조, 갈등과 어두운 배경은 굳이 아서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조커가 된다고 한들 결코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커(2019)는 마냥 아서 플렉의 분노와 광기에 합당함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언더도그마를 경계하는 시퀀스를 적확하게 완성한다. 조커(2019)에서의 언더도그마에 대해서는 재밌는 주제인만큼 2편에서 따로 다루겠다.

 


 이렇게 영화를 맛보고 나면 다크나이트에서 느꼈던 감정과 확연히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다크나이트를 통해 관객들은 영웅의 고독함을 함께 느끼며 감탄한다. 이런 모습을 지닌 영웅이 현실에 아예 없진 않다는 점에 감화된다. 

 하지만 조커(2019)에서는 훨씬 현실적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고담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반박할 수 있는가?


 결국 한명의 약자가 스스로의 입을 찢어 놓은 계기를 설명한 조커(2019)는, 스토리 이면에서 마치 '기생충(2019)'의 매운맛처럼 작용한다. 두 작품 모두 계단이 적절한 때에 등장하는건 우연은 아니다. 공고한 계층구조에서 누적된 불안과 분노가 정당하냐는 철학적 질문까지 충분히 이어진다. 그렇게 탄생한 혼란이 누군가에겐 두렵겠지만, 누군가에겐 축제처럼 느껴짐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준다.




과연 아서 플렉은 씬 안에서만 존재하는가? 

조커는 씬 안에만 있는 가상의 인물일 뿐인가? 

히스 레저의 조커처럼, 일반적인 관념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광기만을 드러내고 있는가?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물으며 글을 닫는다. 

작가의 이전글 테넷, 어렵지 않게 감상하는 꿀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