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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Sep 11. 2021

조커의 입처럼 찢어진 언더도그마(조커 리뷰 2편)

영화리뷰

 영화라는 매체는 드라마와 다르다. 한 편을 통해 서사의 대부분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떡밥'을 어떻게 회수하느냐에 따라 명작 여부가 갈리기도 한다. 

 영화 '곡성(2016)'에서는 극 중 종구(곽도원 분)의 장모, 그러니깐 효진(김환희 분)의 외할머니는 어떤 인물과도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이 떡밥은 제대로 해결되진 않지만 그 대신에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영화에 몰입한 관객이 이를 직접 찾아내고 갸우뚱하며 여러 해석과 탐구를 거치는 그 과정 자체로 중심 스토리 외의 새로운 재미가 창조된다.


https://brunch.co.kr/@isseo307/113

(서로 다른 두 조커에 대해 - 영화 조커 리뷰 1편)


 이 글은 최근 작성한 영화 '조커(2019)'의 두번째 리뷰이다. 이 글에서는 조커(2019)에서 모자 관계로 등장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과 '페니 플렉(프랜시스 콘로이 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페니와 아서, 즉 엄마와 아들의 대화가 작위적이고 들뜬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착하고 힘없는 이들이 허름한 거실을 배경으로 서로 위로하며 힘을 얻는 씬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토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음? 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거 같지?'라는 의문이 점점 늘어났다.


 이런 의문은 뒤로 갈수록 더 단단해졌다. 마치 

 "점심으로 뭘 먹었니?"

라고 물어보면, 

 "막국수는 춘천에서 먹어야 맛있지."

 라는 대답을 하는 것 같은 개연성 떨어지는 대화,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듯한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매우 스무스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느낌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모자간의 허름한 집 장면이 나올수록 '편집된 부분이 많은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별 장면 아니겠거니하며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스토리 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영화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이것들이 모두 확실한 의도하에 계산된 배치임이 드러난다. 관객들은 아서 플렉이 토마스 웨인에 의해 태어나고 버려진 걸로 오해하며 언더도그마의 늪에 빠지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엄마인 페니 플렉의 망상장애와 정신이상으로 야기된 결과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토마스가 아서의 친부가 아닐까, 권력을 이용해 진실을 은폐한건 아닐까'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 질문은 언더도그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토마스 웨인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페니 플렉은 명백하고 확실한 [악]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제대로 거동도 못하는 약한 모습으로 묘사되었기에 관객들의 판단이 흐려졌을 뿐이다.

 아서가 가진 정신 장애와 불안은 페니의 학대로 인한 것이었고, 이 점을 초반 씬에서는 미리 암시한다.

 영화 초반 장면에서 아서가 상의를 갈아입는 장면이 지나가는데, 이 때 아서의 몸에는 오래된 듯한 흉이 보인다. 아서가 사회적으로 겪는 아픔은 사실 가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집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에서'부터' 가장 큰 불행이 시작됐음을 관객들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위 사진의 왼쪽)에서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해, 교묘하게 특정 범행의 용의선상에서 배제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편 영화 '기생충'(위 사진의 오른쪽)에서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인물들이 부유한 계층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며 '기생'하는 모습을 그린다. 


 '언더도그마(Underdogma)'는 '약자는 선, 강자는 악'이라고 가정해버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조커(2019)에서는 지속적으로 부자의 세상과 아서 모자의 힘 빠지는 현실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조커(2019)에서 가장 많이 쓰인 CG는 의외로 '높은 건물의 형태'라고 한다. 제작자는 "높은 건물들이 아서를 짓누르는 듯한 씬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부유층들이 영화관에 모여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며 웃는 장면이나, 토마스 웨인이 인터뷰에서 '광대'를 언급하는 부분도 궤를 같이 한다. 아서 플렉이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짓눌린 형상으로 걸어가야 했던 후미진 장면들과는 정 반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은 '부유'할 뿐, '악'과의 연관성이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토마스 웨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고, 정반대에 서 있는 아서와 페니는 '선'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

 

 진실을 알게된 아서는 각성한다. 약한 [선]으로 묘사되던 페니는 아서에 의해 살해된다. 페니가 [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언더도그마는 한번 강하게 찢어진다그리고 아서는 모친 살해를 통해 그에게 적용되어있던 또다른 언더도그마를 한번 더 잔인하게 찢어버리며 진정한 악의 위치로 올라선다. 

 사실 아서의 살인은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하철에서의 살인에 대해 관객들은 다소 너그럽다. 단지 분위기의 고조와 긴장감만을 조성할 뿐이다. 아서는 3명을 살해했음에도 '절대적 약자', '피해자'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도록 스토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현실로 돌아와보자. 

우리 주변에는 페니 플랙이 과연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의 약자들은 모두 선한가?

우리 주변의 강자들은 모두 악한가?

조커(2019)가 제시하는 여러 질문들 중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물어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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