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ST PROJECT
기억은 사람과 동물을 다르게 하는 특징 중 하나다. 그리고 기억은 사람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한다.
내 최초의 기억을 찾아 올라가보면 동생이 태어났을 때가 떠오른다. 동생의 모습은 기억이 안난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를 봤던 기억이 난다. 나는 바나나를 먹고 있었고 엄마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의 배를 보며 "엄마 배 아파?"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섯 살 정도에는 동생이 길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동생이 태어날 때 손을 잡고 계셨던 엄마 친구의 집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동생과, 엄마 친구의 아들이었던 형아가 함께 였다. 놀다가 동생이 대문을 나갔었는데 왜 안 잡았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앞에서 놀려나보지라는 생각이었나보다. 커서 들어보니 그 때 동생을 경찰서에서 찾았다고 한다. 동생은 세 살의 방랑자가 되어 동구 전하동을 돌았다. 경찰서에 있던 동생은 울지도 않고 즐겁게 있었다고 한다.
일곱 살은 유치원에 다녀왔을 때, 뒷베란다에 계시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엄마는 깍두기를 만들고 계셨다.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입에 넣어주신 깍두기는 내 기억들 중 최초의 깍두기다.
글로 남기기 민망한 기억들은 잊고 싶기도 하다. 병원에서의 기억은 석달치 분량을 잘라 들어내고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모든 기억과 느낌을 송두리째 삭제하고 싶다. 기억은 여러모로 유용하지만, 온전히 기억의 소지자가 필요로 하는 형태로 남아지지는 않는다.
컴퓨터의 기억력은 무한대로 치솟고 있다. 각 컴퓨터의 하드에 남아있던 기억이 인터넷으로 스며들면서 빅데이터가 되었다. 이제 인터넷으로 연결된 컴퓨터들은 그들의 기억력을 모두 공유한다. 그들은 원하는 기억을 원하는 모양으로 남기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필요한 부분을 모아두거나 흩어 놓는 것은 컴퓨터의 기억이 인간의 기억에 비해 편리한 부분이다.
아프고 힘든 기억을 원하는대로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성을 지니게 하는 원동력이다. 컴퓨터는 그저 기계적으로 기억을 남기고 지시가 내려지는대로 기억들을 조합시키지만 인간은 그 모든 기억을 안고 간다. 지워질 기억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인간은 남겨지는 기억들을 쌓아두고, 지워지는 기억들을 잡지 못한 채, 좋은 기억, 슬픈 기억 모두를 '나'라는 주체에 용인시켜야만 한다. '나'가 '남'과 다른 이유는 '남'이 갖지 못한 기억들에 기인한다.
아팠던 기억들은 자연스레 기억이 무뎌지고 지워지지 않는 한, 가져갈 수 밖에 없는 무언가이다. 컴퓨터는 갖고 있는 기억이 컴퓨터의 행동 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은 갖고 있는 기억에 기반하여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그 기억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멈칫한다. 트라우마다.
이렇게 아무리 인간의 기억이 갖는 한계를 인정해도 아픈 기억들은 지우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기억을 마음대로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우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드는 것조차,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