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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09. 2021

성경을 필사한다는 것의 의미

TEXTIST PROJECT

 성경필사를 시작한 것은 2008년 4월부터였다. 햇수로는 13년째. 물론 이 13년이 아주 정직하고 엄격한 기간을 의미하진 않는다. 매일같이 의무적으로 필사를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성경을 '재미있어서' 필사했다. 그 어떤 성경필사보다도 나의 성경필사는 순수했다고 볼 수 있다. 신앙적 의미조차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주변의 지인들은 주로 나에게 '독실'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나를 펄쩍 뛰게 만드는 단어다. 내가 봐온 '진짜로 독실'한 사람들을 보면 이 단어는 나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자주 겉모습만을 보고 쉽게 단어를 사용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독실'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요소는 고작 '매주 성당을 빠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신에게 죄송할법한 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때로는 미사시간에 듣는 신의 행적에 대해 감명받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그 시간만큼이나 딴 생각을 하거나 멍하니 보내는 시간도 많기 때문이다. 정말로 독실한 사람들은 결코 나와 같은 행태로 미사 시간을 보내진 않는다.

  이 '독실'함에 대한 근거 중 하나로 성경필사를 한다는 점도 꼽힌다. 나는 과거 소셜미디어에 성경필사를 했던 일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진심을 담아 성경에 몰입하여 필사하는 '정말로 독실한 신자'들은 굳이 이렇게 사진 올리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사진을 업로드 했던 행위야말로 성경필사를 대하는 나의 자세를 대변한다. 순수한 즐거움, 재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행위로 인해 소셜미디어를 본 사람들에게 '서 아무개는 성경 필사를 할 정도로 독실하구나'라는 명제가 성립해버리곤 한다. 역시 소셜미디어의 삶은 매우 과장되다.


 나는 영어 성경을 필사하고 있다. 굳이 영어 성경을 고른 이유 또한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렇게 안 하면 내가 과연 살면서 영어 성경을 재미로라도 펼칠 일이 있을까 정도의 동기였을 뿐이다. 혹은 한 2할 정도는 이걸로 영어 실력이 느는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영어 성경을 필사하다보면 그다지 도움되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성경에 쓰이는 문장구조나 단어들은 현실에서 당장 사용하는 단어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필사한 부분은 탈출기의 후반부인데, 수 페이지에 이르는 문장 내내 '신에게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 '제사장은 뭘 입어야 되는지', '제단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만 주구장창 언급하고 있다. 


 나의 성경 필사는 루카 복음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요한묵시록을 거쳐 창세기로 왔다. 창세기를 끝낸 후 이제 그 어느 성경보다 필사 기간이 길었던 탈출기도 끝을 냈다. 

 이 순서의 이유는 별개 아니다.

 루카복음을 첫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내 세례명이 '루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공생애 이후 제자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 각잡고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복음서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선택했다.

 나는 원래 음모론이나 '떡밥'이 존재하는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요한묵시록은 그래서 선택했다. 

 이렇게 세 부분을 하고 나니, 막연하게 뭘 필사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첫 역사서인 창세기를 시작했고, 여기서 이어지는 탈출기를 쓴 것이다. 

 그러니깐 나는 '신의 이야기'보다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성경필사를 진행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그런데 성경을 필사하다 보면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미사시간에 들려주는 성경의 일부분들은 이런 부분을 가급적 피하면서 논의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알 수 없다. 나는 성경필사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의 신성에 의문과 질문이 생기는 신자인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경의 모순은 자연스럽다. 지금이야 기독교가 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사실 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서'가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우월주의와 남성 우월주의가 당연하게 성경 많은 부분에 팽배해 있다. 유대인 우선주의도 마찬가지다. 요한묵시록에서는 '구원'에 해당되는 인류의 총 숫자를 14만 4천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다. 성경을 직역하면 한국인들은 굳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나 신에게 독실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물론 신학자들은 성경의 '묵시문학적 성격'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성경의 직역은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기독교 계열의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성경의 직역'에서부터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쌓아갔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교단과 교리가 필요한 이유다. 

 어쨌든 성경을 파고들어서 읽지 않으면 이렇게 마주할 필요가 별로 없는 모순들에 대해, 성경 필사는 대면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성경 필사는 '독실함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정 반대로 '신앙에 대한 도전'을 자아내는 의문을 매 문장마다 제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성경을 오래 필사하다보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오히려 저버릴 수도 있겠구만'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마 성경을 정독하면서 오랫동안 필사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성경 필사는 그 정도로 위험하면서 바다와 같은 이해심을 필요로 하는 행위다. 성경에 널려있는 위험한 문장들과 상황들은 이런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성경 스스로 증명한다. 

 다행히 오랜 성경필사를 하면서 내 종교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걸 쓸 당시에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겠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분명 교황청에서 공인했다면 나름의 해석이 존재할 거라고 보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만약 평범한 가톨릭 신자라면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해'라는 요소가 일방향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 수 있는 은혜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성경을 필사하는 행위는 인간도 신을 이해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문장과 단어만으로는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에 대해 '그래, 신도 그럴 수 있지'라는, 신에 대해 인간 나름대로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것. 그런 자세를 시나브로 갖게 되는 것. 독실한 편이라고 볼 수 없는, 항상 호기심과 궁금증, 의문이 많은 내가, 성경을 필사하면서 느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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