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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02. 2021

다크나이트와 이순신, 그들의 접점

영화리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3부작은 히어로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으며, 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영화다. 



 아이언맨과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시한 SF 및 히어로물들은 지속적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하고 있고, 세계관을 탄탄하게 구축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배트맨 비긴즈-다크나이트-다크나이트 라이즈까지 이어지는 3부작은 넘어서지 못할 산처럼 굳건하다.


 이는 단지 영웅이 멋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웅이 멋지고 화려한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어벤져스 시리즈가 훨씬 압도적이다. 다크나이트는 좀 더 깊이있는 고찰을 제시한다.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한 여타 히어로물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밝지 않은 분위기에서 쭈욱 진행되는 다크나이트는 선과 악이 대체 뭔지를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 질문의 결정적인 폭발은 절대악으로 설정된 조커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선역이자 백기사였던 하비 덴트에게서 드러난다. 악역으로 돌아선 하비 덴트를 보면서 관객들은 '절대'선이나 '절대'악에 대한 관념을 무너트리며 이야기의 전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둠의 기사 역할을 자처하며 표면적인 악역을 받이들이기로 결정한 배트맨이 (관객들에게) 더욱 빛나게 된다. 고담시민들은 하비 덴트가 악으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반대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도주했다고 생각한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고담시민들의 생각 때문에 다음 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 시점까지 고담은 나름의 정의와 평화가 구축될 수 있게 된다. 

 참 아이러니하다.


 고담에 찾아온 평화를 생각하면 배트맨의 결정은 옳았다고 봐야 할까. 어쨌든 브루스 웨인이 그것 또한 선택한 것이고, 그는 항상 '배트맨이 없어도 되는 날'을 희망하며 살았다. 




 놀랍게도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 인물이 우리나라 실제 역사에 존재한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영정(왼쪽),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순신 영정(오른쪽)


 전쟁영웅으로 온갖 공을 세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임금의 시기로 인해 역모의 죄를 쓰게 된다. 반란 수괴 혐의로 몸이 상할 정도가 되고, 선조는 '이순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내용까지 남길 정도. 그럼에도 이순신을 다시 전장으로 내보낸 것은 그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가 이순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명량해전을 시작으로 다시 일본 수군들을 박살내기 시작했을 때, 선조의 마음은 어땠을까. 일단 '휴 다행이다~'는 전혀 아닐 것이다. 이순신에게 씌워진 역모 혐의를 받아들였던 그대로, 또 다시 마음 졸이며 '왕을 뛰어넘을 영웅이 탄생하면 어떡하지..'라는 옹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고담을 보호하던 배트맨은 범죄자를 잡아들이던 공로와는 별개로, 그가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법 위에서 움직인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의 지탄을 받는다. 조커는 이 점을 무기로 시민들을 선동하는데 성공한다. 조커가 배트맨의 얼굴 공개를 협상카드로 내밀면서 시민들을 협박할 때, 시민들은 절대악 조커보다도 오히려 배트맨에게 더 많은 화살을 쏘았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렸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한탄은 난중일기 곳곳에 드러난다. 민중과 국가의 안위보다 겉치레의 유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고위 관리자들에 대한 이순신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선조가 이순신에게 보낸 <기복수직교서>. 죄인이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는 끊임없이 '전쟁 이후 이순신 개인의 위치'를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전쟁을 승리하면 영웅이 되고, 영웅이 되면 왕의 시기를 받는다. 왕의 시기를 받으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되면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전쟁을 패배하면 전장에서 죽거나, 패배했다는 이유로 용서받지 못한다. 

 배트맨에게 닥친 상황과 상당히 유사한 현실을, 이순신은 실제로 맞딱뜨려야 했던 것. 




 배트맨이 사라지면서 고담의 평화는 유지됐다. 하비 덴트법으로 인해 범죄자들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순신은 어떤가. 

 우연찮게도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7년 장기전 동안 수 많은 전투와 전쟁을 겪었음에도,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 한복판에서 생애를 보냈음에도, 하필, 딱, 마지막 전장에서 사망한다. 정말 우연히도 말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왼쪽),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도(오른쪽)


 전쟁 내내 민중에 대한 걱정보다 이순신에 대한 시기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선조는 이순신이 죽고 나서야 '충무'라는 시호를 내린다. 아마 그에게는 전쟁도 끝나고, 이순신도 사라졌다는 '꿩먹고 알먹고' 같은 상황에서 기분 좋게 '충무'라는 멋진 시호를 내리는 것은 아깝지 않은 선물이었을듯 싶다. 


 다크나이트에서는 배트맨이 자취를 감추면서 고담은 지켜졌다. 그리고 속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배트맨이 '진짜로' 사라지는데, 이 상황이 사실 이순신의 '사라짐'과 더 유사하다. 공식적으로 배트맨은 죽은 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배트맨은 동상까지 세워지고 박수를 받는다. 

 이순신도 죽고 나서야 선조에게 '충무'라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고담에 몇 없는 정의로운 사람, 존 블레이크는 배트맨의 자산을 이어받는걸로 묘사된다.(왼쪽) 병자호란의 참담한 상황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오른쪽)


 하지만 이순신의 죽음이 배트맨의 사라짐보다 더 안타까운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의 역할을 해줄, 정의로운 누군가에게 충실히 자신의 자산을 남겼다. 하지만 이순신이 일생동안 받았던 질투는 오히려 전시상황에서 영웅의 등장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거운 일인지를 각인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었던 임진왜란과 다르게, 병자호란때는 임경업 외에는 딱히 영웅이라고 할 만한 누군가가 탄생하지 못했다. 



 다크나이트와 이순신의 사례를 보고 우리는 뭘 실천할 수 있을까? 배트맨은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통해 '없어지면서 완성된' 영웅이 되었다. 과연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을 추앙하면서 동상을 제작한 것으로 고담시는 완성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실은 이순신 장군처럼 사라진 영웅에 대해 안도하며 충무공이라는 별칭까지 부여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회의 지속적인 안정으로 이어졌는지를 돌아보면 새드앤딩이라고 봐야 맞다.


 그렇다고 순수하게 정의로운 영웅이 현존할 때, 그를 신처럼 떠받들고 종교화 하는 것도 옳진 않다. 이 행태 자체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가치판단을 막기 때문이다. 다만 대중들의 위치에서, 적어도 영웅을 칭송할 때 한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만큼, 영웅을 비판할 때도 한템포 쉬어가는 자세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순신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충청남도 아산의 현충사


 영웅이 떠나고서야 과하게 감동받고 고작 동상을 보며 박수치기보다, 영웅이 고까워 보인다고 시기하고 질투하기 보다, 묵묵하고 조용하게 영웅을 지지하면서 영웅의 마인드를 조금씩 내 삶의 범위 내에서 실천하는 바로 그 정도의 마인드 말이다. 


 마치 존 블레이크가 묵묵한 지지를 통해 배트맨의 정체를 간파하면서 그의 삶을 지지한 것처럼. 

 수 많은 이순신 휘하와 그 지역 의병들이 장군의 지휘에 따랐던 것처럼. 

 결국 그들이 떠나고서야 과한 박수, 과한 칭송을 보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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