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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14. 2022

사탄이 잠깐이라도

TEXTIST PROJECT

1.

 나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각색하며 엉뚱한 상상을 하길 좋아한다. 이런 상상 없이도 성경은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상상까지 덧붙인다면 신앙과 별개로 성경을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주교는 예수의 부활을 맞이하기 전, '사순'이라는 기간을 지낸다. 신의 아들이 수난의 과정을 겪은 후 죽음을 맞이하고 부활하기까지의 시퀀스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사순시기의 초입부에서 맞이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을 이겨내는 부분'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예수는 깨달음을 위해(성경에서는 '성령에 이끌려'라고 표현하지만 비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풀었다.) 광야로 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40일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 이 기간이 끝나고 악마는 유혹의 필살기 3연타를 날린다. 

첫째는, "40일이나 굶었으니 배고프지?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지 않냐?"

둘째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여주며, "나한테 경배하면 이 세상을 다 너 줄게."

셋째는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세운 후, "당신이 신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살 수 있지?".

예수는 이 세 유혹을 물리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천주교 신자가 받아들여야 할 내용은, 정석대로라면 두 가지 정도다. '예수님도 유혹을 경험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은 이걸 이겨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교리적인 해석들을 덧붙이며 신앙을 출중하게 만드는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 얘기했듯, 좀 더 현실적이면서 엉뚱하게 상상을 붙여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사탄이.. 생각보다 허술한데?'


2.

 사십일이나 되는 기간동안 끊임없이 유혹하던 사탄은, 나름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저렇게 세 차례의 필살기를 날린다. 하지만 일격은 전혀 일격스럽지 않다. 그나마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식욕'을 노린 첫번째 유혹이 나았다고 봐야 할까. 


 사탄은 예수의 능력을 도발하면서 식욕을 함께 자극했다. 그.나.마. 나았다고 보여지는 이 공격조차도 더 강하게 다른 방식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을 예수의 눈 앞에 들이민다거나, 아니면 예수의 눈 앞에서 본인이 그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먹방을 찍는다거나 했더라면. 좀 더 힘든 유혹이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첫번째 유혹은 두번째나 세번째에 비해 나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여주며 고작 한다는 말이, "너 가질래?"라니. 사탄이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봤더라면, 회사에서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준비해봤더라면 결코 이렇게 똥같은 유혹을 필살기랍시고 쓰진 않았을 듯 하다. 

적어도 '보고있는 세상 중 자신의 지분이 얼마나 있는지', '그 세상의 소유권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지', '그 세상의 가치는 어느정도 되는지', '보고있는 세상의 자산 규모가 어떻게 성장해왔고 미래의 발전 규모는 어느정도로 예측되는지', 결정적으로 '얼마나 확실하게 소유권 이전 절차를 보장해줄 것인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대는 무려 '그 세상'을 직접 만든 신의 아들이다. 사탄이 굳이 "나한테 절하면 너 줄게!"라고 하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다.


 세번째 유혹은 유치함의 끝을 달린다. "너 여기서 뛸 수 있냐?"라니. 만약 사탄의 두목이 제 3자의 시선으로 이를 보고 있었다면 민망함에 고개를 확 돌릴 수 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요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도, 돌이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서 "여기서 뛸 수 있는 사람!" 이런 거 잘 안 한다. 아마 예수를 유혹하기 위해 온 사탄은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아 오늘 빨리 퇴근하고 싶은데'라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막연하게 온 듯 하다. 예수라는 보통이 아닌 존재를 유혹하러 오면서 그의 능력을 시험하려 한다면, '능력을 보여주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용' 정도는 깔끔하게 표로 정리하고 수치화하여 정성껏 설명했어야 했다. 그 정도 유혹이나 설득은 되어야 예수도, '안 뛸 거긴 한데.. 준비는 가상하네'정도의 생각은 할 것 아닌가.


이렇게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못해본 사탄이 예수를 유혹하러 온 덕분에 영광된 승리는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다. 


3.

 어디까지나 엉뚱한 상상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는 묵시적인 측면이 클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까지만 표현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걸 안다. 엉뚱한 상상은 엉뚱한 상상으로 두자. 

 다시 천주교 신자의 관점으로 돌아오면 유혹과 수난,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 매우 압축되어 쓰여져 있다고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천주교 신앙을 가진 자로서 예수님도 그러했듯,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고난을 인내하는 삶의 자세를 일상 속에서 가지며 살아가면 될 것이다. 


 어쨌든 "한번 뛰어보슈."는 좀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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