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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n 25. 2022

불멸의 레스토랑

TEXTIST PROJECT

1.

 내 첫 '고급 레스토랑'의 기억은 울산 동구에 있는 '한마음회관'이라는 장소에 존재한다. 이 곳 1층에는 '동구랑'이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다른 메뉴를 먹었던 기억은 없다. 오로지 이 곳에서 기억나는건 돈까스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동구랑 돈까스는 생생하다. 수프가 먼저 나오고 '사라다'가 나온다.(샐러드가 아니다.) 그리고 어린 나에게는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큰 그릇에 돈까스와 밥 조금, 완두콩과 콘샐러드가 나온다. 


 내가 고사리만한 손으로 '나이프'라는 것을 처음 잡아본 기억도 바로 이 동구랑이다. 나는 밥숟가락과는 다른 '경양식 스푼'을 꽤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 스푼은 집에 있는 숟가락과는 다르게, 숟가락 부분이 타원형이 아니라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더 움푹 패여있어서 수프가 숟가락에 올라오면 그 모양이 예뻤다. 그렇게 기억한다. 사라다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에 서빙되는 돈까스를 기다리며 슬며시 사라다 그릇을 멀리 밀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골고루 먹어야지"라는 권유를 들으며, '그래, 곧 돈까스가 나오니깐!'이라는 생각을 다지며 꾸역꾸역 숙제처럼 먹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좀 커진 뒤로는 사라다 위에 올려진 오이를 남겼고, 더 머리가 커진 뒤로는 아예 사라다를 먹지 않았다. 식성이 좋은 동생은 사라다를 두 그릇씩 먹을 수 있었다. 


 돈까스 그릇이 나오면 나이프로 꼬물꼬물 돈까스를 썰고 입에 넣었다. 그 바삭하고 고소하고 달콤한 맛은 아직 입에 맴도는 것 같다. 나는 한번에 한조각씩을 썰고 입에 넣었지만, 동생은 항상 돈까스를 전부 썰고 먹었다. 우리는 둘 다 어렸기 때문에 엄마가 도와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칼과 포크를 들고 식사라는 행위를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구랑은 이색적이고 들뜨게 하는 장소였다. 


2.

 동구랑을 아주 자주 갔던 건 아니지만, 이벤트 느낌이 필요할 때, '이 정도의 날에는 동구랑을 가야지' 같은 가족 내부의 어떤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엄마 생신을 맞아 동구랑을 간 적이 있었다. 네 가족은 모두 살짝 들뜬 상태에서 맛있게 식사를 먹었다.(아마 나와 동생은 돈까스였을 것이다.) 나와 동생은 모두 착한 어린이들이어서 부모님께 뭔가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였어서 그런지, 우리는 벽에 붙어있는 '콤비네이션 피자 8,900원'을 보고는 그걸 사가자고 졸랐다. 그렇게 심하게 조르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쉽게 지갑을 여셨다. 우리가 조른 것도, 집에 '피자'라는 군것질 거리를 사가게 된 것도(우리 가족은 한식이나 건강식 위주로만 군것질 거리를 사는 편이었다.) 모두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집에 돌아와서 그 피자를 먹었을 때는 그다지 맛있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랑을 방문하고, 식사를 하고, 피자를 사온 일련의 과정이 모두 행복하고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종종 외식을 다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동구랑은 뭔가 확실히 달랐다. 내가 대학 생활을 위해 울산을 떠나야 했던 그 때까지도 동구랑은 '내가 아는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내게 인지될 정도였다.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 레스토랑 안쪽에는 작은 무대와 악기들, 레스토랑 정 중앙에는 커다란 목재 범선까지. 중고등학교때 동구랑을 방문했을 때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맥주잔 하나 놓고 멋있게 먹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3.

 스무살이 되어 나는 울산을 떠나있게 되었다. 대학생활 4년은 총알처럼 지나갔다. 군 시절을 강원도에서 보내고,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스무살은 서른 다섯살이 되었다. 

 서른다섯살이 된 나는 울산에 오랜만에 방문한 김에, '한마음회관'을 찾았다. 그리고 1층 동구랑의 위치로 발을 디뎌봤다. 동구랑은 없어져 있었다. 어쩌면 더 일찍 없어졌을지도, 혹은 며칠 전에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없었다. 동구랑의 어두운 목재 인테리어가, 돈까스가, 중앙에 놓여있던 범선이, 이제는 없다. 충분히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곳 어딘가에 앉아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동구랑은 그저 하나의 대명사일 뿐이다. 이 대명사는 '울산'이 되기도, '동구'가 되기도, '방어진고등학교'나 '한마음회관' 등의 다른 어떤 단어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구랑이 유독 아쉬운 이유는, 나 개인의 영역에서 사라지거나 바뀐 것들을 상징하는 대명사들 중 거의 유일하게 '미각'이라는 감각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구랑은 기억에만 남아있게 됐다.


4.

 결혼 후 아내와 좋은 레스토랑을 꽤 자주 찾아다닌다. 어떤 맛이건, 어떤 분위기건, 나름의 매력과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앞으로 그 어떤 곳도 동구랑만큼의 그리움을 주진 못하고 있다. 동구랑은 없어져 버렸다는 공고함까지 갖추어 버렸으므로, 앞으로도 기억에 스크래치를 내지 못한 채 '최고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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