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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l 04. 2022

굳이신 이야기

TEXTIST PROJECT

 모태신앙으로 천주교를 믿어온 터라, 나에게 다른 여러 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종종 그 실체를 어느정도 인정한 딱 하나의 다른 신이 있다. 바로 이름하여 '굳이신'이다.

 굳이신은 내가 모태신앙으로 믿어왔던 유일신보다 자주 내 일상에 등장한다. '굳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굳이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굳이신이 '신'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이유는 신적인 능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틈이나 가구에 발가락을 찧을 때가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각했을 때, 그 위치는 발을 찧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찧는다. 그것도 꽤 자주. 이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즉, 어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다른 세계의 어떤 영향력이 행사되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굳이신이다. 

 굳이신은 정말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휴대폰이나 이어폰을 '굳이' 떨어뜨리게 한다거나, 돌멩이에 발이 '굳이' 걸리게 한다거나, 카페나 음식점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 '굳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는 주문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등등. 예시는 수천개도 더 들 수 있다.

 굳이신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이놈의 신이 엄청나게 큰 시련을 준다거나 인생 자체에 브레이크를 건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옹졸한 규모의 자잘한 기분나쁨을 지속적으로 선사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커피를 흘렸는데, 그게 잘 닦이는 소파가 아니라 '굳이' 얼룩이 남는 옷이나 쿠션에 묻을 때, 고작 그 사실로 분노하는 순간부터 옹졸한 주체는 바로 내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암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기에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굳이신은 그렇게 옹졸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인간들의 옹졸함을 시험한다. 그 시험을 통과한 자도, 통과를 못하고 분노를 표출한 자도, 어쨌든 생체기는 남는다. 그래서 나는 신이지만 굳이신을 싫어하고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나는 문틈에 발가락을 찧고 새끼발가락의 발톱이 희안하게 부러져서 깎을 수도 뜯을 수도 없는 쓰라린 상태에서, 존재 유무조차 확인 안 된, 나름대로 '신'이라는 존재를 이토록 몰아세우고 비난하며 분노를 좀 풀어본다. 어쨌든 나는 옹졸한 사람이라 결국 굳이신을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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