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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l 16. 2022

이 시국의 빨간 마스크

TEXTIST PROJECT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항상 괴담들이 유행한다. 가령 '열두 시가 되면 학교의 책 읽는 동상이 움직인다'거나, '학교터가 원래 공동묘지였고, 밤에는 영혼들이 돌아다닌다'라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단연 빨간 마스크의 위상이 탑이었다. '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어린이의 입을 찢는다'는 그로데스크한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빨간 마스크 괴담은 생명력이 강했다. 내가 처음 이야기를 들었던 90년대 후반에 유효한 줄 알았는데, 2004년 뉴스에도 보도된 적이 있을 정도로 주기적인 사이클이 존재했다. 빨간 마스크 괴담의 첫 등장이 80년대 초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처음 들었던 시기 또한 돌아온 사이클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야기의 오리지널은 일본이다. 70년대 후반에 '입 찢어진 여자'라는 내용으로 아예 기사가 보도되었다고 한다. 한국 기준으로는 1983년에 처음 수입(?)되었고, 1993년도에 다시 괴담이 돌았다. 그리고 90년대 전체를 아우르며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했고, 2004년에 다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빨간 마스크는 꽤 오랜 세월동안 유행의 선두에 서있었지만, 안타깝게도 2010년대까지 넘어오진 못했다. 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실존인물이라 가정하고 첫 등장 해인 1983년도에 서른 살이었다고 치면, 한국에서 마지막 괴담이 돌았던 2004년에는 쉰한 살이시겠다. 2022년을 기준으로 보면 69세의 노년이 되어 있으실 것이다. 괴담의 생명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으레 많은 괴담이 그러하듯 빨간 마스크 이야기 또한 다양한 설정이 붙으면서 성장했고, 아류작들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주목할만한 아류는 '하얀 마스크'다. 하얀 마스크는 빨간 마스크의 천적이라는 설정이다. 또 하얀 마스크는 어떻게든 빨간 마스크를 찾아내어서 그녀의 입을 세로로 찢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파란 마스크, 노란 마스크 등등의 베리에이션이 존재했더라. 유치한 확장판들이지만 2022년에 돌아보면 아주 무의미하진 않다. 

 하얀 마스크 버전이 근거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빨간 마스크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설명된다.  '2000년 초반 등장 후 좀 더 파괴력 있는 등장을 위해 십수 년을 기다렸으나, 세상에 하얀 마스크가 떼거지로 판치는 탓에 아예 자취를 감춰야 하는 빨간 마스크의 슬픈 이야기' 정도로 말이다. 

 여튼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빨간 마스크는 이 시국에서는 명함조차 들이밀 수 없게 됐다. 굳이 하얀 마스크 같은 확장판 이야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빨간 마스크가 마스크를 내리면서 찢어진 입을 보여주는 그 순간, 어린이는 찢어진 입을 보고 놀라기보다는 '이 시국에 마스크를 내린다고?'라며 조금 다른 포인트에 경악할지 모른다. 혹은 69세의 빨간 마스크 착용 여성분 께서는 KF80 이상의 마스크가 아닌 탓에 방역수칙 위반으로 신고를 당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벌금을 내야 할지 모른다. 뭐가 됐든 빨간 마스크 이야기는 파훼될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과시하던 괴담조차 얼씬 거리지 못할 정도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빨간 마스크 괴담이 시국적인 설정 탓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은 얼마나 더 길어질 것인가. 이제서야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어느 정도 벗어도 되는 것마냥 슬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철저히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살고 있다. 빨간 마스크는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녀를 기다리게 되리라 상상도 못했다. 이 시국이 빨간 마스크보다 무섭고 잔인한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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