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의 마당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뉴스를 보다보면 우리 사회는 당장이라도 붕괴할 것 같다. 정부도 기업도 어렵단다. 10대부터 90대까지 힘들지 않은 이들이 없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고충 투성이인데 해결되는 것도 없다. 주식시장도 부동산도 원자재도 난리다. 뉴스에서 좋은 얘기를 찾아보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출산율도 사회 붕괴를 의심케하는 요소 중 하나다. 나야말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조건과 세대에 속해 있다. 과연 사회는 청년들이 아이를 안 낳는 것인지, 못 낳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걸까.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스스로의 미래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 2세까지 밀어 넣어 달라고 바라는 사회는 무심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출산율이라는 확실한 숫자로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줄어든 게 확실하다. 그래서 아파트 놀이터나 동네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귀하다.


울산에서 내가 다녔던 성당은 마당이 넓었다. 나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모두 보냈다. 기억 속 학교와 학원, 친구들은 학년에 따라 바뀌었지만, 성당만은 그대로다. 성당에서 찍은 유아세례 사진부터, 첫 영성체를 받았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사진, 캠프를 갔던 6학년 때의 사진,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의 사진이 모두 남아있다. 성당을 배경으로 말이다. 군 휴가를 나왔을 때, 가족들과 찍은 사진도 있다.

성당 마당의 기억은 설렌다. 작은 골대를 놓고 축구를 한 날은 미사시간에 땀 냄새가 진동했다. 한번은 일찍 도착한 날 엄청 높은 농구 골대에 혼자 공을 던지고 있던 기억도 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신부님께서 "안 들어가나?"라고 말씀하셨었다. 이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그 신부님이 유독 엄하고 혼을 많이 내는 신부님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안 들어가나?'라는 목소리가 매우 인자하게 들렸다. 그 이질감까지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미사가 끝날 때면 교리실 앞 테이블에선 자모회 어머니들께서 간식을 주셨다. 떡꼬치라던지 컵떡볶이 같은 간식은 그 시간 그 마당에서 먹기에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아마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먹었던 만나보다 맛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성당에서는 부활절과 성탄절마다 항상 밤 미사가 끝나고 마당 전체에 테이블을 놓은 상태에서 어묵탕을 먹었었다. 나는 이 때의 어묵맛도 여전히 생생하다. 단언컨대 그 어묵 국물보다 맛있는 국물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사춘기 시절에는 평일에도 혼자 터덜터덜 성당까지 걸어와서 마당 벤치에 음악을 들으며 앉아있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성당의 마당은 어린이들에게 학교 운동장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제공한다. 성당을 다니는 어린이들에게 학교와 학원 말고도, 더 넓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학적이 다르더라도 모이게 된다. 또 6년, 3년, 3년 단위로 끊어지는 학교의 시스템보다 지속력이 강한 공간임을 체감하게 해준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졸업과 입학을 통해 갈라지기도, 새롭게 만나기도 하지만, 같은 성당을 다니는 친구들은 멀리 이사가지 않는 한, 학교의 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보게 된다.


성당의 마당은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한 장소다. 나는 서울의 성당들을 다니며 혼란스러웠다. 서울의 성당들은 대부분 마당이 좁거나 없었다. 그나마 지금 다니고 있는 성당은 서울에 있는 성당치고 마당이 넓다. 물론 전라남도 장성에 있었던 성당 마당에 비교하기엔 부끄럽다. 여기는 염소도 키웠었다. 신앙을 떠나서,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의 유무만으로 성당에는 생기가 돋는다.

우리나라는 무신론 국가나 다름없다. 인구주택총조사에는 여전히 5:5 정도의 비율로 종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눠지긴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주 종교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명목상 종교는 OO교'인 상태를 포괄하고 있다. 앞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내가 종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자본주의가 주는 보상은, 종교가 주는 그것과 비교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달콤하다는데 동의한다.

서구 유럽 국가나 남미 국가는 가톨릭이 국교이다시피 한 곳들도 많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아예 'God'이라는 존재가 명문화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들의 국교적 성격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 신앙은 단지 신앙이 아니라 문화다. 교리적으로 커리큘럼에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과 태도에 녹아있다.


나는 성당의 마당이 단지 신앙의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곳은 문화의 공간이다. 어린이들은 성당의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는 종교가 확장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아이들이 학교와 공원 말고도, 최소한의 도덕적인 잣대를 제공하는 어떤 공간에서 뛰어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의 공간에서 뛰어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성당의 마당에서 공을 차고 달리기를 하고 간식을 먹으면서 신나야 한다. 세상은 아이들이 줄어든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공간을 점점 줄이는 중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도 성당의 마당은 아이들에게 관대해야 하고,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깔깔대고 웃으며, 그곳에서 오랫동안 서서히 자랄 수 있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항상 막연하게 생각한다.

고작 일요일 하루만 성당에 갈 뿐이지만, 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린이들에게는 순수한 웃음이 있다. 신앙은 복잡한 교리보다 아이들의 웃음으로 훨씬 간단하게 설명된다. 성당 마당의 꽃과 나무가 자라듯 아이들이 이 곳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며 바르고 자유롭게 자란다면, 아이들이 커서 가톨릭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일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당의 마당에서 한 아이가 꿈을 키우며 바른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종교의 역할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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