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비트짜리 사회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뉴스가 아무리 싫어도 마냥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보여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연인이 되어 산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살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혹은 자연인이 되더라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눈을 감고 싶어진다.


모든 뉴스는 편을 가른다. 편이 있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A의 편이 아닌 타를 바라보며 C나 D나 E일 거라는 가정이 아예 없는 세상이다. A의 편이 아니면 B의 편이라고 단언하는 세상이다. 기사로 작성된 뉴스는 제법 근엄하고 품위있는 단어로 편 가르기를 조장해 준다. 이어서 원색적인 편가르기의 표출이 댓글 창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빨갱이'가 아니면 '쪽발이'가 되고, '꼰대'가 아니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된다. '한남'이 아니면 '한녀'가 되고, '경상도'가 아니면 '전라도'가 된다.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가운데 어딘가즈음 존재하는 상태는 가정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하릴없이 뉴스를 봐야 하지만, 원색적이고 적나라한 단어들은 뉴스를 닫고 싶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가령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한다. 시진핑을 싫어하지만 푸틴이나 아베도 싫어한다. 나는 쪽발이인가 빨갱이인가. 나는 서울에 살고 있고 경상도에서 자랐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전라도에서 자라셨다.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인 아내와 어머니를 사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가운데 어딘가 즈음이거나, 혹은 양자 모두에 해당되거나, 더 다양한 색깔을 자신 안에 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에 서서 그 편에 들지 못한 모든 이들을 증오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이 극소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나 사회나 뉴스는 가장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변해야 할 텐데, 관심을 끌고 인기를 얻기 위해 오히려 다수보다 극소수가 하는 행동처럼 편 가르기를 탄탄하게 묘사하고 단 두 개의 선택지만을 제시한다. 내 편이냐, 아니냐.


우스운 일이다. 전임 대통령은 퇴임한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빨갱이'나 '전라도'로 시작하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조롱받는다. 놀랍게도 그는 경상도 출신이다. 멸공을 외쳤던 기업인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공의 횃불'이라는 노래를 불러보지 않았을 것이다. 반미를 외쳤던 수 많은 정치인들은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보내고, 종북을 외쳤던 수 많은 정치인들 또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될 때면 치적에 이름 석자 얹으려 최선을 다한다. 편 가르기로 권세를 누리는 많은 사람들조차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어딘가에 속한 듯 속해있지 않고 가운데 어딘가 즈음에 있는 건 분명하다. 그들이 "이 안에 속하지 않는 모든 이는 절대악"이라고 소리치는 비좁은 울타리조차, 만드는 자들부터 선택적으로 쉽사리 넘나들고 있다.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이다. 편 가르기와 목소리를 팔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의지보다 더욱 과장되게 상대편을 섬멸할 것처럼 얼굴을 붉혀야 해서, 그래서 일부러 얼굴이 찡그려지는 추악한 행태조차 감수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렇게 뉴스와 댓글 창은 '가운데 어딘가 즈음 어떤 위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묘사와 표현을 절제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이용한다. 정작 세상을 이 모양새로 만든 목소리 큰 사람들은, 카메라가 꺼지면 필요에 따라 반대편에 서 있는 자와 포옹을 하고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신다. 뉴스와 댓글을 본 가운데 어딘가에서 별 생각 없이 하루하루 존재하는 나같은 사람들만 '나도 어딘가에 속해야 하는 건가?'는 불안감을 갖는다. "너 우리 편 맞아? 확실히 선택해."라고 으르렁 거렸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세상을 요약하면 '저급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겠다. 혹은 '품질이 낮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겠다. 세상이 만약 프로그램이나 제품이라면 나는 구매하지 않으리라. 저급하고 저품질인 프로그램은 불매가 답이다. 4K를 넘어 8K도 심심치 않게 집에서 접하는 시대에,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아이맥스와 4DX로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정치와 사회와 뉴스는 철저히 딱 2비트짜리만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있더라도, 2비트 내에서 한정지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선 그 세상을 바라보는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0과 1 중 무엇이냐고.

미안하지만 나는 0과 1중 어딘가인지 모르겠다. 둘 다를 가지는 양자의 상태일 수도 있지만, 아예 2나 3일 수도 있고 0.n일 수도 있다. 혹은 음수이거나 루트를 씌운 숫자일 수도 있다. 이 나라에는 5천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고, 5천만의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지당하다. 뉴스를 보고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내가 어떤 편일까 고민하며 열을 내는 게 아닌 것 같다. 0에 설지 1에 설지 결정하라는 저품질에 대답하는건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저 턱을 괴고 스크롤을 내리며 '아, 이런일이 있구나, 점심은 뭐 먹지.' 고민하는게 가장 현명한 일일 수 있다. 그것이 '누구 편이냐'에 대한 대답을 정하는 것보다 훨씬 고사양의 데이터를 요하는 일임은 확실하다. 적어도 식사메뉴를 정할 때는 '자장면'과 '짬뽕'이 아니라 '짬짜면'도 있고 '볶음밥'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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