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라운드 룰

소설 연재

by 서인석

계획과 실천은 딱 한 걸음 차이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의 두려움이 뒷 걸음을 치게 만든다. 수없이 이 산, 저 산을 옮겨다니며 어두운 하늘 속에 빠져드는 상상을 했지만, 실천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자 아예 몸 속에서 흐르는 피가 바뀌어버린 듯한 이질감과 두려움이 몰아쳤다. 물론 설레임까지.


엑셀을 열고 위치와 일정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자, 머릿속에서 긴장감을 포함한 활기가 돌았다. 여행은 계획할 때의 설레임까지 포함한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나의 경우는 순수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별 관측이 얽혀있다보니 계획을 아주 상세하게 짤 순 없었다. 캠프의 위치도 지도의 대략적인 '이 쯤' 정도로만 짚어둬야 했다. 막상 갔을 때, 그 위치가 캠프를 차릴 수 없거나 관측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획은 필요했다. 이렇게라도 정리해두지 않으면, 그나마의 효율성조차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막연한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계획을 짜면서 엑셀의 시트 하나를 더 추가했다. 그라운드 룰이 필요했다. 내 스스로 생활의 규칙은 정해놓자는 것. 자칫하면 이도저도 아닌 무모한 여행으로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별을 감상하고 그걸 촬영하는 일로 포장했지만, 따지고 보면 갑작스레 정상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노숙하는 사람일 뿐이기도 했다. 내 스스로가 이런 범주에 들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나를 조이는 룰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줄 한줄 적기 시작했다.


- 술은 절대 마시지 않는다.

아마 차는 나의 유일한 이동수단이면서 집일테다. 언제 어떤 상황에 시동을 켤지 모른다. 술은 입에 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딱히 아쉽진 않았다. 술을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다.

- 매일 일지를 쓴다.

구구절절 길게 쓸 필요는 없겠지만, 어딘가에 기록을 남길 필요는 있다. 혹여라도 아주 미래에 다시 이런 류의 생활을 하게 된다면 충분히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적인 이야기는 쭉 빼고 담백하게. 오늘은 뭘 했고, 뭘 찍었고, 얼마나 잘 찍었는지 정도.

일기장을 하나 살까 싶었는데 그냥 블로그에 쓰기로 했다. 방문자가 아예 없다시피한 블로그이므로 부담도 없다. 사진을 함께 올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한 번 촬영하고 대충 안보게 될 지도 모르는 촬영 결과물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용도로 좀 더 세심하게 고르고 보정하는 '업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복장을 신경쓴다. - 특히 등산복 금지!

이걸 타이핑하면서 고민을 좀 했다. 주로 산 위주로 캠프를 차리게 될 거였고, 밖에서의 잠이 반복될 것을 생각하면 등산복이나 트레이닝복만한게 없다. 땀도 잘 마르고, 먼지에도 강하다. 하지만 이걸 적은 이유는 괜한 오기였다. '나는 아직 아저씨가 아니다' 정도의 생각.

트레이닝복은 잘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단서에 포함하지 않았다. 이렇게 적으면서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편한(그래봐야 등산복보다는 훨씬 불편한) 맨투맨 복장에 편한(마찬가지로 그래봐야 등산복에 비할 바 못되는) 청바지를 입고 캠프의 의자에 앉아, 한 손에는 캠핑컵에 내린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간이 테이블에 올려둔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눈을 감고 떠올린 이 모습은 '젊어'보였다. 등산복이 아닐 뿐인데도 말이다. 누군가 보라고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좀 더 만족할 만한 생활이 될 것 같았다.

머리 한 구석에는 걱정이 함께 따라왔다. 짐이 확 늘어날 게 뻔하다. 세탁의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 줄을 썼다.


-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목욕탕을 간다. - 가급적 하루 한번

내가 움직일 코스들이 대부분 사람들이 잘 다니기는 커녕 길조차 없는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이 생활로인해 게을러지면 안 씻은채로 며칠씩을 견디게 될 것이다. 조금 더부지런하게 움직이겠다는 다짐으로, 마을이 있는 위치로 움직여서 씻는게 불가능하진 않다.

또 이렇게 마을로 내려가는 김에 코인세탁소 같은 곳이 있으면 빨래까지 해결할 수 있겠다. 빠르게 강원도 지역의 세탁소들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많았다.


- 끼니는 규칙적으로, 하루 두끼 이상을 꼭 챙겨먹는다.

100일이라는 일정을 잘 소화하려면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입원 생활을 잊지 말자. 움직이는 생활을 한다고 대충 떼우는 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다가는, 오히려 몸이 망가져 일찍 이 생활을 마감해야 할 수도 있다.


이 정도 적으면 되겠지, 또 필요한게 생각나면 나중에 적어봐야지 하면서 다시 앞 시트를 눌러 계획을 메꾸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다시 그라운드룰 시트로 돌아와 한 줄을 더 적었다.


- 조급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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