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퇴사'는 현실과 많이 달랐다.
정장 안주머니에는 흰색 봉투가 있다. 봉투 겉면에는 '사직서'라는 한자가 궁서체로 써있다. 팀장의 자리로 가서 그의 눈을 날카롭게 3초정도 응시한 후 품 속으로 손을 넣어 봉투를 뺀 후, 책상 위에 스윽 올려놓는다.(혹은 홱 집어던진다.) 팀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그저 고개만 한번 꾸벅 숙이고는 말없이 돌아선다. 팀장은 "이봐, 박 대리!"하며 나를 부르지만 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만 띈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내 자리로 돌아온다.
자리에는 정리된 상자가 놓여있다.(짐은 결코 많지 않아야 한다.) 팀원들은 이미 일어나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주저없이 상자를 든다. 그리고는 특정한 누군가를 보지 않고, 전체를 향해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후, 그대로 문을 나선다.
이게 내가 생각했던 '퇴사'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현실의 퇴사는 좀 더 복잡하고 민망하며 반복해야 하는 씬도 많았다.
일단 '사직서' 같은 한자를 찾아보고 봉투 겉면에 쓸 일도 없었고, 그런 봉투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사내 시스템에서 퇴직 처리를 누르면 된다. 시스템에 퇴직처리를 올리고 그냥 집에 가면 되는게 아니다. 퇴직이라는 버튼을 누른 후부터 '진짜' 퇴직까지 한달여가 소요된다.
부서장과의 면담이 한두차례 진행되고, 업무의 인수인계 절차를 팀원들과 여러차례 논의해야 한다. 인사팀 담당자와의 면담, 인사팀장과의 면담이 이어진다. 사업부장과도 면담을 해야 한다.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면담할 때마다 계속 반복해야 한다. 민망할 수 밖에.
퇴사 절차를 밟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면담을 많이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퇴사자를 붙잡기 위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기엔 그 누구도 나를 잡으려고 하진 않더라. 나오고 나서 한참 뒤에 어렴풋이 든 합리적 의심은(아직도 확실하진 않다.) 각 면담을 했던 담당자들이 '이 사람이 퇴사한 사유는 나 때문이 아닙니다.'라는 확실한 증빙을 남기고자 했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부서장부터 인사팀장과 사업부장에 이르기까지, 가장 내색 안하는 척하면서도 가장 알고 싶어했던 질문은 "어디로 이직하는가?"였다. 면담은 대부분 면담자의 질문과 나의 대답으로 진행되는데, 이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어디로 이직하는가?"였다.
그렇다고 면담이 긴 편은 아니다. 누구와 면담을 하더라도 20분 안팎으로 면담은 끝났다. 인사담당자나 인사팀장과의 면담은 유독 더 짧았다. 그들의 면담은 유독 '퇴사자가 이동하는 업체의 제안조건'을 판단하려는 질문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것 같다'고 표현한 이유가, 그 질문들을 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어서이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한 이후, 인사담당자도 인사팀장도 조금 벙찐듯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팀 내에서도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팀원들에게까지도 나의 퇴사 면담 소식이 전해지자 몇몇 분들은 이유를 물었다. 나는 "별을 보려고요."정도로 대답했다. 내가 천문학과를 나왔다는걸 아는 팀원들은 놀람과 설렘이 섞인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의 출신을 모르는 팀원들은 놀람이 훨씬 더 높은 비중으로 섞여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뒤쪽 자리의 부장이 어느날 슬쩍 선물상자를 건냈다. 그와 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그분은 퇴사 선물이라고 했다. 필요할거라고 하며 건낸 그 선물상자에는 캠핑용 조명이 들어있었다. 나중에서야 그분이 '캠핑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의 매주 캠핑을 다니는 분이고, 그래서 '별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이런게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나의 노숙 생활이 시작된 후, 이 조명은 생활 밀착형으로 활용됐다.
팀원들과 따로 송별 회식같은건 하지 않았다. 내가 워낙 조용한 편이다보니 다들 따로따로 산책하거나 커피 한잔씩 하며 퇴사를 응원해주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역시나,
"어휴, 나도 빨리 나가야지.".
나는 그 얘기를 들을때마다 미소를 지어보이곤 했다.
모두가 같은 굴레 속에서 움직이는 일은 지루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 굴레에서 혼자만 벗어나게 되는 상황에 놓이면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다.
퇴사라는 버튼을 누르고 한달여동안 면담과 인수인계, 팀원들과의 인사를 반복하면서,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걱정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다.
나는 이 곳에서 떨어져 나가는구나. 그것도 내발로. 대체 왜..?
한달여가 걸리다보니, 출근 마지막날 내가 생각했던 모습처럼 상자를 들고 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짐들은 하나둘씩 정리하는게 가능한 긴 기간이었다. 마지막 출근날 맨몸으로 왔다가 인사팀에 들러서 필요한 서류에 싸인을 하고, 자산을 반납한 후 맨몸으로 나가면 됐다. 팀원들이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팀원들과 함께 현관에 도착했을 때, 반대쪽 복도에서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앞 회의를 끝내고 서둘러 온 듯 했다. 밝은 표정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회사의 CI가 눈 앞에 보였다. 매일마다 보던 문자가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회사의 담벼락과 철문이, 입사 후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회사에 담이 있다는 걸 자각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 어떤 벽보다 견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회사 앞 경비실을 지나면서 진정으로 퇴사를 마무리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