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집에 있는 크고 작은 가구와 가전들을 중고마켓을 통해 정리했다. 많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막상 거래를 통해 얻은 비용의 합계를 내어보니 무려 300만원 가량이었다. 생각하지 못한 추가 예산이 생긴 느낌이다. 앞으로 적어도 100일간은 지출만 발생할 예정이다보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집은 텅 비고 차에 실을 마지막 짐들만 남았다.
집의 짐을 정리하는 일은 큰 걱정거리였다. 가령 침대나 책상같은 가구들은 그 크기 때문에 버리기도 애매했고 중고로 내놓는다고 해도 내놓는 순간 바로 팔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출발 일주일전까지도 중고마켓에 내놓을지 말지를 고민했던 물건이 문학전집이다. 한권 한권 사모으다보니 스무권 가량이 되었는데 다른 비싼 가구나 가전보다도 유독 아까웠다.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다닐 수도 없었다. 관측을 위해 챙긴 몇 권의 관련 도서와 전공책들만으로도 차에 싣고 다니기에는 부피나 무게가 상당했다. 끝끝내 고민하다가 동생에게 모두 택배로 보냈다. 한 100일 정도만 맡아달라고.
100일의 탐험을 끝내고 돌아와서 동생에게 다시 이 책들을 돌려받을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어떤 기분으로 읽혀질까. '이방인' 또 어떤 느낌일까.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집은 점점 불편해졌다. 침대가 팔리고, 책상이 팔리고, 의자가 팔렸다.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책꽂이, 냉장고가 뒤이어서 팔렸다. 판매할 수 없는 큰 옷가지들과 이불, 베개를 엄마의 집에 보낸 출발 3일 전부터는 아예 텅 빈 집에서 여행동안 싣고 다닐 담요와 매트를 깔고 자야했다.
대신 마음의 걱정과 짐은 덜어졌다. 이 집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질 때, 비로소 나는 편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겠구나.
내 소심함과 예민함은 어떤 결정이라도 그 결정까지의 절차가 힘겹다. 만약 내가 털털하고 시원스런 성격이었다면 좀 더 빠르게 많은 행동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뚜벅이로 10년간 회사생활을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판단해야 하는 요소는 생각보다 많고 복잡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미룬 것이 10년이다.
직장인이라는 신분이 지속될거라는 가정하에 차를 샀다면, 번듯한 새 차의 계약서에 싸인을 했을지 모른다. 지금은 번듯한 모양새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차량 자체가 필요하다. 적어도 100일동안 이 차는 이동수단이면서도 주거공간이어야 한다. 중고차 매매단지를 방문했고, 예산에 맞는 리스트의 차량에 대해 찬찬히 설명을 들었다.
레이를 선택해서 최대한 지출을 줄일지, 팰리세이드를 구입해서 공간 효율을 높일지 결제 마지막까지 고심했다. 두 모델은 거의 서너배 가까이 가격차이가 있었다. 퇴직금과 전세 보증금, 모아놓은 적금을 생각했을 때 중고 팰리세이드가 무리한 지출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지출 액수를 떠나서 망원경을 비롯한 관측 장비들을 싣고 다니기에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렇게 이 생활을 위한 가장 큰 지출인 자동차 구매를 마무리지었다. 4천만원.
생애 첫 차를 사면 설렐 줄 알았다. 하지만 고작 차 구매로 설레기엔 모험 출발 날짜가 너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침내 출발로 점찍어둔 날 아침. 평상시보다 조금 불편하게 눈을 떴다. 모든 짐은 어제 저녁 차에 정리해두었다. 이제 정말, 진짜로 출발만 하면 된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기 전, 은행 앱으로 입금된 전세보증금을 확인했다. 집과 직장이 없는 방랑자의 생활로 들어서게 됐는데, 막상 앱으로 숫자를 확인해보니 상당한 부자가 됐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관측 메모를 위해 구매한 노트 가장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그동안의 적금 : 8천만원
- 집 보증금 : 5천만원
- 차량 구입 : -4천만원
- 망원경 및 부속품 : -2천만원
- 노트북 : -200만원
- 캠핑 도구, 발전기, 상비약 등 : -400만원
→ 잔고 : 6천 4백만원
안전벨트를 다시 한번 착- 당겨보고 시동을 걸었다. 100일 후의 삶은 일단 제쳐두자.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도 이미 몇 달이나 됐다. 그래, 100일 후의 밥벌이를 고민할 거였다면 이렇게 출발하지도 않았으리라. 6천 4백만원은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현금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떠돌이들 중 내가 가장 부자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출발하자. 이미 떠나온 안정적인 생활을 아쉬워하지도 말고, 100일 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집을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차는 새차 부럽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도로를 뒤로 밀어냈다. 트렁크와 뒷좌석에 꽉 찬 짐들이 묵직하게 덜컹거렸다. 짐들도 100일간의 모험을 위해 힘껏 땅을 밀어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