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모든 처음은 어설프다는 변명

소설 연재

by 서인석

첫 관측의 후일담을 선선한 가을 바람처럼, 혹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려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모든 처음은 처음답다.


호기롭게 서울을 떠난 첫 날, 점찍어둔 첫번째 스팟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질주하듯 도착했다. 평일 낮 시간, 강원도로 뻗어있는 고속도로는 고속도로라는 명칭에 모자람이 없었다. 뻥 뚫린 길을 달리며 은연 중에 '100일 동안 이 도로처럼 물 흐르듯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가정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지도에 표시해둔 첫 스팟은 애매한 언덕이었다. 지도로만 봤을 때는 등고선도 나쁘지 않았고, 포장된 도로와도 딱 적당한 정도로만 떨어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도에만 표시된 정보다.


지도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정보를 누락하고 있다. 가령 이 스팟의 위치가 마을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표시되어 있었지만, 이 스팟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지는 담고 있지 않았다. 또 이곳이 괜찮은 언덕이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평지가 있다는건 나타나 있었지만, 얼마나 높고 울창한 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지는 담고 있지 않았다.


포장된 도로 밖으로 핸들을 틀고 비포장 도로를 통과하여 스팟까지 오면서 이 사실들은 시나브로 가까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차가 비집고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계기판은 시속 10km 이내를 유지해야 했다. 표시한 위치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나무들 사이에 안전하게 주차한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캠핑족이었거나 자연인이었다면 이 첫번째 스팟은 오히려 좋은 위치였을까.

첫날의 미숙함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이 장소가 좋은 위치인지 침착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고, 일단은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차에서 내렸다. 어찌됐든 처음은 설레는 법 아닌가. 트렁크를 열고 필요한 짐들을 꺼냈다.


캠프를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큰 짐을 먼저 빼야 했다. 망원경이나 카메라, 태블릿,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들은 뒷좌석에 편안하고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접이식 천막과 돗자리, 간이 테이블, 옷가지를 넣어둔 가방 등이 트렁크에 있었다. 천막은 트렁크의 가장 아래에 있었기에 다른 짐들을 다 꺼내야 비로소 꺼낼 수 있었다. 짐들을 몇개 꺼낸 것만으로 등과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8월 말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름이었다.


우왕좌왕 차 주변에 큰 짐들을 꺼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등산객인지 주민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 힐끗 쳐다보며 나무들 사이로 가까워졌다가 이내 차를 지나서 멀어졌다.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삼십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새에 지나간 사람만 대여섯명은 됐다.


그제서야 나는 이 곳이 관측 캠프로서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지도에 등산로라고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엄연히 마을 사람들이 오고가는 가장 주요한 도로나 다름없었다. 이 생각이 들었을 때조차 두 사람이 지나가며 "여기까지도 차가 올라오는구만?"이라는 대화를 흘렸다.



이 정도로 사람이 오고가면 캠프는 절대 설치할 수 없다.

만약 이때라도 빠르게 다른 장소로 옮겼다면 시간을 꽤 절약했을 것이다. 왜 하필 굳이 그 순간에 그라운드 룰 가장 마지막 줄이 떠올랐을까.

'조급할게 뭐 있나.'


***


우당탕탕을 반복하며 어찌저찌 캠프를 모두 셋팅했다.

돗자리 위에는 관측에 참고할 별자리 지도를 펼쳤고, 테이블 위에는 영상 녹화를 위한 노트북과 카메라를 두었다. 이제 망원경을 세우면 된다.


현실은 이상과 괴리되어 있었다. 우거지고 높은 나무들은 망원경의 시야를 아주 비좁게 한정했다. 육안으로만 봐도 이 장소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은 몇 안된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미 캠프를 설치하는데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던터라 관측 따위는 마음 한 구석으로 미뤄놓았던 결과였다.


망원경까지 모든게 다 설치되었을 때,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캠핑용 간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중에 의자는 왜 그렇게 안락한 건지. 8월 막바지에서 9월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인 것 마냥 산 속의 바람은 시원하게 두 뺨을 훑고 지나갔다. 별자리 지도도 돗자리 위에서 살랑거렸다.


휴식도 잠깐이다. 여전히 이 길로 사람들은 수시로 지나다녔다.

한 중년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말을 붙였다.

"여기서.. 주무시게?"

"아, 예."

중년의 아저씨는 제법 신사답게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뭐라고 할 수는 없다만.. 보시다시피 여기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야."

아저씨는 손짓으로 꽤 넓은 범위를 가리켰다.

"저 너머 약수터로 가려면 딱 여기를 지나가는게 편하거든. 계속 사람들이 왔다갔다 할텐데.. 밤에도 말이지."

"이렇게 산 속인데도 사람들이 밤에도 계속 지나다니실까요?"

"산 속은 무슨. 여기 그렇게 오지는 아니에요, 청년. 요 아래쪽이 바로 찻길이어서. 저- 아래쪽 보여? 거기가 자잘하게 경작지들이 몇 개 있고. 저 뒤는 아까 말한 약수터고. 여기 동네 사람들은 여기가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야."

막연하게 느꼈던 지도의 불완전함은, 주민 아저씨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여기에서 차를 빼야 할까요?"

"아이고, 내가 무슨 경찰도 아니고, 여기서 뭐 하라마라 할 수는 없지요.. 근데 여기 이 끈들 있잖아."

아저씨는 천막을 땅과 결박시킨 끈을 가리켰다.

"이런건 밤되면 안보여서 사람들 오며가며 걸릴거 같고. 저 망원경 다리도 혹여라도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잘 못 밟으면.. 사람들이 불편한 것보다 청년이 더 불편하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두어명의 사람들이 옆을 지나갔다. 아저씨는 그렇게만 얘기하고 다시 자기 갈 길로 멀어졌다.


첫번째로 자리잡은 이 곳에서 법적으로 캠핑이 된다 안된다를 떠나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며 신기한 눈길을 받는건 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었다. 물만 한모금 꺼내 마신 후, 천천히 캠프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시를 넘기자 언덕 위쪽에서 아랫쪽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늘어났기에, 이제 나는 양 방향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캠프의 설치보다 철수가 훨씬 수월했다. 고작 한 번 만져본 도구들인데, 그새 손에 익은 모양이다. 차에 모든 짐을 다시 다 실은 후 진이 빠져버렸다. 운전석에서 지도를 꺼냈다. 표시해 놓은 스팟 중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워 보이는 장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두번째 장소까지는 이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에서 스팟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표시해 둔 곳은 찻길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아스팔트길 바깥으로는 마치 갯벌마냥 질퍽였던 것이다. 나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안쪽 땅을 밟아 보았다. 신발이 푹- 진흙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도 들어가기 힘들어 보였다.


고개를 빼쭉 내밀어 안쪽을 보니 공간은 괜찮아 보이는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곳이 내비게이션으로 찍어둔 스팟이다.


아까와는 정반대로 인적은 드물다못해 아예 없었다. 이 위치까지 오면서도 지나가는 차조차 한대도 만나지 않았다. 잠깐 선채로 손을 턱에 댄채 생각했다. 무리해서라도 이 공터로 차를 진입시킬까.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도출된 결과값은 '안된다.'.

차가 안전하게 들어갔다고 가정하더라도, 돗자리를 깔고 테이블을 놓고 천막을 치고 망원경을 설치하는게 불가능한 땅 상태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힘이 쭈욱 빠졌다. 이제 어딘가로 이동하더라도 더 뭔가를 해볼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를 돌려서 읍내로 내려왔다. 순대국집에 들어가 국밥을 한그릇 주문했다. 출발해서 강원도까지 온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속도 없이 배는 제 때 고팠다. 순대와 국물을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으며 왼손으로는 유튜브에서 '캠핑 꿀팁'들을 검색했다.


영상을 보면서 왜 이렇게 나는 아무 준비없이 허술하게 출발했을까하는 한탄이 밀려왔다. 꽤 오랫동안 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고 자부했었는데, 막상 떠나오니 아무 준비도 안한 것마냥 모든게 서툴렀다. 앞으로 나의 99일은 얼마나 더 험난할지, 밥을 국물에 말며 출발할 때의 설렘을 함께 말았고, 밥과 국물을 입에 떠 넣으며 자책감도 함께 삼켰다.



읍내 찜질방으로 향했다. 목욕탕은 한산했다. 그래도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그자 마음이 조금 풀렸다. 눈을 감았다. 내일은 조금 더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지. 앞으로의 시간계획에는 '스팟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감안해야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하루를 복기하며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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