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운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1.

두 달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한다. 내가 갖고 있는 병은 이 정도의 주기적인 병원 방문과 진료만으로 괜찮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병을 다룰 수 있는 병원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다섯 병원 중 하나인 이곳은, 방문할 때마다 '세상엔 아픈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다. 병원 근처만 도착해도 명절을 방불케 하는 정체현상을 맞닥뜨린다. 모두 병원으로 들어가는 차들이다. 병원은 최근 주차 공간을 늘리는 공사를 완료했다. 그전 주차장이 결코 작지 않았음에도, 이 병원을 찾는 수요에 비하면 모자랐다는 방증이다.


주차 후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감각은 더 또렷해진다. 광활한 로비를 온갖 사람들이 메꾸고 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부터 의료기기에 누워서 뭔가를 팔에 꽂고 있는 사람까지 가득 차있다.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마련된 소파들도 자리가 없다. 소파에 자리 잡은 이들의 표정과 태도만으로 얼마나 병원생활이 오래된 사람들인지, 얼마나 중증인지 대강 구분이 간다.


다급해 보이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은 중증 환자의 보호자인 경우가 많지만, 의외로 병원생활은 오래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병원 생활이 오래된 보호자는 다르다. 이들은 아예 소파에서 자리 잡고 앉아있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오랫동안 장기전을 치르고 있는 군인의 그것과 같다. 신병에게 총성은 대포나 미사일 소리에 버금가지만, 노병에게 총성은 숨소리만큼 가까이 함께해 온 적이자 벗일 테다. 그들은 장비도 넉넉하다. 콘센트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고, 담요나 물티슈 같은 생필품들도 털털한 가방에 착착 갖추고 있다.



2.

내가 방문하는 진료과는 동선상 응급실 입구를 지나가야 한다. 팬데믹 이후 진료과와 병실로 진입하는 위치에는 바리케이드가 하나 더 생겼고, 바코드가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 그 바리케이드 안에 응급실을 지키는 가드가 한 명 더 있다. 응급실의 무게다. 로비에 있던 보호자들이 장기전의 사이클 중 한 번의 숨을 돌리는 시간에 머무르는 중이라면, 이 응급실은 당장 총성이 귀를 스쳐 지나가는 전장 한가운데다. 응급실의 문이 닫혀있어도 느낄 수 있다. 여기는 죽음이 가까운 곳이다. 나는 매번 이곳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료과로 향하는데, 잠깐이나마 인간에게 죽음은 숨 쉬듯 머무르고 있음을 체감한다.


때로는 이곳으로 의료침대를 끌고 달려 들어가는 부대를 마주한다. 나는 빠르게 옆으로 비켜선다. 침대 뒤로는 보호자들이 함께 달려 들어간다. 의료기술은 상상 이상이라, 대부분의 경우 이 전쟁터에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은 승리한다. 죽음의 기운 정 중앙으로 들어간 전사들은 생존이라는 승리를 쟁취한다. 숨처럼 머무르는 죽음의 문턱을 이겨냈다는 것, 이 큰 병원과 복잡한 시스템의 존재 이유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들은 더 알찬 삶을 살기 위해, 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생존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테다.



3.

나는 이것들을 <죽음의 기운>이라고 부른다. 삶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이 죽음의 기운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응급실 말고도 장례식장이 있다. 현대의 장례식장은 대부분 병원시설과 함께 존재한다. 장례식장의 '식장'에 죽은 이의 신체가 존재하진 않지만, 실제로 장례식장은 영안실과 같은 건물에 존재하므로 물리적으로도 죽음의 기운은 가깝다. 영혼이나 귀신을 믿는 여부와 관계없이 장례식장의 무거운 공기는 내가 정의하는 <죽음의 기운>의 범주에 속한다. 죽음의 기운은 살아있는 자들이 슬픈 감정의 공유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지는 무엇이다.


죽음을 어떤 이유로든 자주 접하는 자들은 죽음의 기운에 더욱 정확하다. 할아버지가 다른 세계로 떠나던 날, 정말 우연하게도 나는 병상의 할아버지를 뵈러 갔었다. 많이 편찮으시구나,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해야겠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다시 나의 터전으로 길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내가 길을 돌린 사이에 그 강을 건넜다. 만약 내가 죽음을 자주 접한 사람이거나 그 기운에 민감한 자였다면 병상의 할아버지를 보고 발을 돌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죽음을 접한 적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 죽음은 그저 그라데이션 같았던 모양이다. 죽음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편찮음과 죽음이 이어지는 내러티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터다.


당시 간호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간호사는 "준비하라"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환자들을 많이 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음을 잘 안다고 했다. 간호사는 "사흘 이내"라고 했다. 몇 시간 또한 '사흘 이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죽음을 항상 접하는 간호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죽음에 대해 막연했던 나와는 다르게, 간호사는 단호한 죽음의 경계선을 오랜 경험으로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4.

내 삶에서 죽음의 기운이 가장 섬뜩하게 존재했던 순간이 있다. 한동안 나는 병원 생활로 고생했다. 오랜 입원 생활 끝에 병원에서는 나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벤투호의 빌드업 축구처럼 차근차근 여러 절차를 확인하고, 이 결정적인 공격이 확실히 안전하다는 걸 확신한 후 시행됐다. 공격의 행위는 수 시간짜리의 주사 투여.


이 주사를 투여하기 전까지 나는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으로 수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주사를 투여하는 날, 몸이 해진 느낌으로 주사실의 침상에 누웠고 중심정맥관을 통해 주사가 투여됐다. 이후의 기억은 없다. 어떤 꿈도, 감각도 없이 수 시간을 잠들었다. 가끔 이 시간 동안 내가 혼절한 게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슬며시 암연과 현실의 경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청각이다. 아주 작게 귀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마치 가위눌렸을 때 들리는 듯한 그런 소리가 맴돌았다. 나는 솔직히 암연에 좀 더 존재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눈은 뜨지 않았지만 내가 깼다는 건 인지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느껴지는 주변의 공기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분명 몇 달 만에 거의 처음으로 편안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와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가 날카로웠다. 무거웠다. 몇 분쯤 눈을 감고 있었을까. 갑자기 통곡소리가 들렸다. 귀에 맴돌던 웅성거림과는 확실히 다른 소리에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을 정도. 몇몇 사람들은 흐느꼈고 몇몇 사람들은 크게 울었다.


눈을 뜨자 병원의 천장이 보였고 부모님이 보였다. 그리고 내 침상 주변을 두르고 있는 천이 보였는데, 통곡 소리는 그 천 너머로 건너왔다. 천은 벽과 달라서 소리의 울림을 사정없이 전했고,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바로 그 얇고 하얀 천 너머로 죽음이 존재함을.


아직도 나는 통곡 소리가 들리기 전, 눈을 감고 있던 그 몇 분간의 감각조차 과연 죽음의 기운이었을지 알 수 없다.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몇 분 뒤 죽음이 존재했던 건 확실하므로, 죽음의 기운은 분명 가깝고 무겁게 그 주사실 내부를 짓눌렀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순식간에 경계를 건너갔다.



5.

여러 글에 나를 담지만 병원에 있을 때의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다. 그때를 떠올리는 건 여전히 힘들다. 이렇게 그때의 이야기를 쓴 이유는 <죽음의 기운>을 쓰기 위해 내가 가져올 수 있는, 그 어떤 다양하고 대중적인 죽음의 이야기보다, 가장 날카롭고 섬뜩했던 개인적인 경험이 훨씬 선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 경계면이 단호했고, 살아있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 갈길을 떠날 만큼 엄격하다. 아직 나는 이때의 죽음의 기운 말고 그 어떤 선명한 죽음의 기운을 겪지 못했다. 그것은 다행인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세상이 이보다 명확한 이치는 없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고, 내가 모르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널린 게 죽음이지만 죽음의 기운은 결코 가깝지 않다. 세상이 어떻게 설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이 널린 것처럼 죽음의 기운까지 세상에 널려 있다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는 일상을 잃게 될 터다. 죽음과 죽음의 기운은 유사하지만, 죽음의 기운은 우리의 일상과 떨어져 있기에, 우리는 삶을 일상으로 온전히 누린다. 살아간다. 이 설계구조는 모순되지만 세상이 생생할 수 있게 한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찬 만큼 삶으로 팽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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