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의 상실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1.

뇌가 굳는다는 표현. 어지간해서는 최대한 이 표현을 1인칭에서 미루고 싶다. 명석함, 똑똑함을 젊은 나이, 어린 나이에만 한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인류의 바람이다. 안티에이징이라는 단어는 꼭 외모에만 붙이는건 아니다.


그렇게 명석한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서른 네 살인 내게 뇌가 굳는다는 말은 아직 이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마음이 굳는다는건 느끼고 있다. 마음이 굳고 문이 닫힌다. 점점 이 문은 열리기가 어렵다. 책을 대하는 마음 이야기다.


2.

책, 특히 소설을 좋아한다. 물론 영화도 좋아하지만 책과 다른 형태다.

예를들어 영화는 누구에게나 일정한 시간으로 이야기를 제공한다. 나에게 2시간짜리 영화는 타인에게도 2시간동안 스크린에서 진행된다.

책은 다르다. 200페이지짜리 책을 누구는 두시간만에 읽고 누구는 두달에 걸쳐 읽는다. 읽는 도중에도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임의 선택이 가능하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다.


10대때와 20대때는 닥치는대로 소설을 읽었다. 수험생때는 문제집 밑에 소설을 깔아놓고 숨겨서 읽기도 했다. 20대, 특히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책을 마시다시피 읽었다. 매주 홍천 읍내의 서점에서 책 한권씩을 사왔지만 이야기를 갈구하는 굶주림을 채워주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나는 군생활동안 과중한 업무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소설을 읽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책을 읽는동안 나는 군부대가 아닌 다른 세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새로운 책을 거침없이 펴들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쉽게 이동했다.


3.

언제부턴가 마음이 굳었다. 책을 읽는 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책은 펴들지 않게 된다. 자꾸 읽었던 이야기를 다시 읽고 또 다시 읽는다. 그게 나쁘게 느껴지거나 불만족스럽다는건 아니다. 나는 독서량이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책이 재밌어서 읽을 뿐이기 때문에, 책을 어떻게 읽고 얼마나 읽는지에 책무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변한 스스로가 인지될 뿐이다.


대학생 때나 군시절보다 주머니 사정은 훨씬 넉넉해졌고, 회사의 복지제도를 통해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추가 루트도 생겼다. 그래서 어릴 때보다 새 책은 훨씬 많이 산다. 만약 앞에서 이야기한 군시절이었다면 새 책을 사기가 무섭게 와구와구 씹었을 것이다. 몇 년간 새로 산 책들 중 삼분의 일 정도는 책꽂이의 오브제 역할만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나쁘지 않다. '읽을 책을 사는게 아니다, 산책을 읽는 것이다' 라는 말도 있으니. 게다가 이렇게 어떻게든 책이 있으면, 언젠가는 꼭 읽게 된다.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새 책을 한 번 펼치기에는 왜인지 높아져버린 내 마음의 문턱이 나이듦을 증명하는게 아닐까하는, 황망한 심정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4.

지난 달에도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읽었던 <대제국 고구려>를 맛있게 읽었고, 며칠 전에는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칼의 노래>로 마음을 채웠다. 이미 결과와 문체를 모두 아는 책들. 수십 번씩은 뽑아 들었기 때문에 손때의 위치까지 기억하는 책들.

이 책들을 펼치기 위해 망설임은 전혀 생기지 않고, 혹시 '결말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지', 혹은 '이야기가 아쉽게 진행되면 어떡하지', 같은 두려움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다 알기 때문에, 맛있을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저 맛있게 잡수면 된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점점 신작이 상실되고 있다. 나만 유달리 그런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가.

나이가 들수록 성장하고 대담해지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마주하기까지의 용기나 결정의 무게가 훨씬 더 크게 필요한 것은. 책뿐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대할 때도, 새로운 것들을 겁없이 마셔보기보다는 알던 것들, 가까운 것들만을 편안하게 잡으려 하는 것은.


신작은 상실되는 중이다. 어떠하리.

여전히 나는 금새 <데미안> 옆에 선 또다른 싱클레어가 되고, <설국>의 주민1이 되어 눈길을 밝으며, <이방인>의 재판정에 앉은 시민1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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