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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Aug 10. 2023

프롤로그 : 설명하면 이미 진 것이다

 2000년대 후반, 국제관계학과의 학부생이었던 나는 새 학기 수강신청기간에 생소한 단어를 마주했다. <국제관계와 연성권력>이라는 과목. 과목의 담당 교수님은 에너제틱한 강의를 신선한 주제들로 진행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 해당 교수님의 강의는 그만큼 타이트하다는 단서도 항상 덧붙여졌다.


 꽤 열의 넘치는 학생이었던 터에 그다지 겁먹지 않고 해당 과목을 수강했다. 조금 자랑을 해보자면 <국제관계와 연성권력>을 비롯하여 해당 교수님의 과목을 서너 개 수강했고, 졸업 때까지 모든 과목에서 한 개의 성적만을 받았다. 다양한 사례를 접하고 열정 넘치게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엔돌핀이 도는 것을 느꼈던 나에게, 해당 교수님의 수업 주제와 강의 방식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연성권력(soft power : 소프트 파워)이라는 생소했던 단어. 강의시간에만 들었던 이 단어는 점점 뉴스나 신문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다. 해당 단어는 국제관계에서 주로 통용되지만, 나는 이 단어가 우리 주변의 많은 상황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


 소프트 파워를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매력'이다. '문화력'으로 한정 짓는 서술가도 있지만, 문화력은 소프트 파워의 세기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이지, 소프트 파워의 전부는 아니다. 소프트 파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대 개념인 하드 파워(hard power)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국제관계에서 하드 파워는 그야말로 국가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를 일컫는다. 군사력, 경제력, 인구수, 영토의 크기 등, 숫자나 데이터로 어렵지 않게 산정할 수 있는 힘이다. 이 설명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지구상에서 하드파워가 가장 강한 나라는 미국이겠구나'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소프트 파워는 하드 파워에 비해 추상적이다. 최근에는 국가별 소프트 파워의 순위를 매기는 통계도 나오고는 있다. 그러나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 자체가 칼같이 순위를 나눌 수 있는 속성이라기보다는 국가 간의 상대적인 개념에 가깝다. 소프트 파워가 강한 국가는 매력, 혹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높다. 다음은 소프트 파워의 예시이다. 


 당신이 한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도슨트가 다가와서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은 마치 프랑스인처럼 그림을 감상하는군요."

 이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까? 당신이 애당초 삐딱한 사람이라서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도, "그게 무슨 의미죠?"정도로 물어보는 정도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프랑스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문화적인 이미지, 왠지 모르게 우아하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떠올릴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도슨트가 다가와서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은 마치 짐바브웨인처럼 그림을 감상하는군요."

 오해하지 마시라. 짐바브웨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 파워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가 모두 낮은 나라를 예시로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림을 감상한다'는 태도와 '짐바브웨'라는 나라가 갖는 이미지는 쉬이 매칭되진 않는다. 물론 국가의 인지도면에서도 앞서 언급한 '프랑스'와는 차이가 있겠다. 


 사실 가장 간단한 예시는 동북아시아의 국가들로 들 수 있다. 

 서양인들은 아시아권 사람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당신이 유럽 여행 중이라고 가정하자. 한 서양인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중국인이세요?"

 기분이 어떤가?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일본인이세요?"는 어떤가?  

 그렇다면 "한국인이세요?"는 어떤가? 물론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주관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중국과 일본보다 먼저 '한국인'이냐고 물었을 때 화색이 돌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주관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한국인' 질문을 제외하고 판단해 보자. 

 '일본인'과 '중국인' 질문 중에 어떤 게 더 기분 나쁜가? 앞서서도 언급했듯 중국인이 조금 더 부정적으로 들린다. 일본과 중국의 소프트 파워가 어느 정도 차이 나는지 정량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더 강한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동북아시아 국가들 중에 가장 의아하고 부정적으로 들리는 질문은 아무래도 다음 질문 아닐까?

 "북한 사람이세요?"




소프트 파워를 다른 분야에 적용해 본다면


 꼭 국가 간의 비교, 국제정치학 분야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개념을 차용할 순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한 무리의 친구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중 한 명은 좋은 학벌과 학력, 좋은 직장과 상당한 자격증을 갖고 훌륭한 커리어를 일궜다. 이 친구는 하드 파워가 강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무리 중 다른 한 명은 커리어가 화려하진 않지만 왜인지 모르게 호감이 간다. 이 친구와는 어딘가 함께 여행을 가고 싶거나 사업을 같이해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프트 파워가 강한 친구이다. 물론 하드 파워가 강한 친구가 소프트 파워도 강할 수도 있다. 국제관계로 치면 미국과도 같은, 그런 친구 아닐까.


 회사 생활을 어느새 10년 넘게 하고 있다. 나는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정치학도이지만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국제정치로 배운 개념을 기업 환경이나 브랜드 이미지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꽤 재밌지 않을까. 이 매거진은 이렇게 전공과 현재의 소속을 버무려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다. 


 써보기로 결정하고 초고를 작성하다 보니 기업 환경이야말로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재밌는 분야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프트'와 '하드'를 떠나서 기업의 규모와 힘은 과거의 그것과 판이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괴물급' 기업들은 국가에 비견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당장 삼성의 매출을 보라. 캐나다의 GDP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을 국가로 치환하면 GDP 순위 20위 이내의 강력한 국가가 되는 셈이다. 애플은 어떤가. 10위 이내, 혹은 G7 내에도 들어올지 모른다. 




천하의 OO가 혓바닥이 왜 이리 길어?


 여러 국제정치학자들은 소프트 파워를 정량적으로 수치화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학자들의 영역이다. 대신,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나는 소프트 파워를 줄곧 다음과 같이 매우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소프트 파워가 강할수록, 강함을 증명하기 위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소프트 파워가 약할수록, 강함을 증명하기 위한 설명은 길어진다."

 이를 글로벌 기업 환경에 적용하면 다음 세 질문의 차이를 통해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벤츠가 성능이 좋아요, 도요타가 성능이 좋아요?"

② "벤츠 살래요, 도요타 살래요?"

③ "벤츠 가질래요, 도요타 가질래요?"


 ①은 하드 파워의 영역이다. 자동차의 성능이나 기능, 연비 같은 스펙에 대한 질문이다. 

 ②는 가성비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같은 재화가 있을 때, 고객의 입장에서 합리적 소비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③은 이 매거진의 주제인 소프트 파워의 영역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그저 당신이 뭔가 하나를 가진다면 뭘 더 갖고 싶은지, 앞선 요소들을 배제한다면 뭐가 더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묻는다.


 이 매거진을 통해 나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기업이나 브랜드 몇 가지를 예시로 들 예정이다.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창출할 때, ①과 ②만 충족해서는 강력한 충성심을 가진 고객을 확보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과, 경쟁업체와의 대결에서 ③이 결정적인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소개할 것이다. 


 자, 그럼 소프트 파워의 강함을 '긴 설명 따윈 필요 없음'으로 증명하는 사례들에 함께 다가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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