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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05. 2023

흔적

TEXTIST PROJECT

 오랜만에 은행에 갔다. 무거운 업무는 아니었다. 창구에 앉았는데 창구직원과 고객의 사이를 가르는 투명 아크릴 판이 있었다. 모두를 멀게 만들었던 흔적이다. 


 돌아본다. 

 왕관 모양의 바이러스는 정체를 알 수 없었고, 인간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서로를 멀리한 채 마스크를 쓰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갖춰졌고, 예방 주사도 접종이 가능해졌다. 이때는 이미 모두가 세상의 혼돈을 받아들인 때였다. 항상 사람이 가득하던 공간은 '임대 문의'를 붙여 놓고, 암표로도 구하기 힘들던 프리미어 리그의 관중석은 천으로 가려졌으며,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을 만나는 공간에 가지 못하는 그런 혼돈 말이다.


 누군가는 이 상태를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건 전쟁인 적이 없었다. 서로에게 무기를 휘둘러야 비로소 전쟁이라 부를 텐데, 인간은 방패만 들었고 바이러스는 무기만 들었으니 이것은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이 무렵에 대학교를 입학한, 그러니까 청소년에서 청년이 되는 젊음들은 에너지를 분출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를테면 캠퍼스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학과 단체 멤버십 트레이닝을 가서 액티비티나 술자리를 즐기는 등의 활동 말이다. 

 아니다. 여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아예 강의실에 모여 앉아 수업을 들을 기회조차 잃었다. 그들이 학교를 쉬지 않고 다녔다면 올해나 내년에 졸업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일방적인 폭력에 우리는 조심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세대, 계층별로 팬데믹의 가학을 견딘 사례는 다양할 것이다. 이 글에서 이 모든 사례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그런 몇 년을,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돌아보니 벌써 '몇 년'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게 된 정도의 기간이 지나버린, 그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는 많이 아팠고 또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거대한 일이고 '몇 년'이니까 긴 시기다. 우리는 전쟁을 이기지 못했는데, 이제 어느새 사람들은 일상을 찾아가고 있고 거대했던 시대를 빠르게 잊어가고 있다.



 바이러스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터널을 다 나왔다고 생각한다. 터널을 지나오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하릴없이 통제되거나 바뀌었다. 

 그 흔적이 남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여전히 근무일수의 절반 정도는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있다. "코로나가 끝났는데 왜 아직도 재택근무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경영진은 재택근무의 효율성을 인정하게 됐다고 답했다. 문장 안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직원들이 사무공간에 나오지 않게 되자 필연적으로 발생하던 비용이 절감됐다. 전기나 수도 등의 인프라 비용이다. 

 또한 직원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업무에 문제가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직원의 부재로 문제가 생긴다면 그 또한 중간관리자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되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유관 업체들과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재택근무를 유지하는 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위 내용에는 회사의 입장만 담겨있다. 그러나 직원들의 입장에서도 효율성은 확실하다. 출퇴근 이동 시간의 절감만으로도 업무 효율은 상당히 올라간다.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은 출근을 하면 된다. 선택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찌개류가 나오는 식당을 가면 기본적으로 국자와 개인 그릇을 준다. 바이러스 전과 후 먹는 음식은 같은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그동안의 위생관념에 대해 눈을 뜬 듯하다. 당연히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진정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종종 사무실에 출근하고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혼밥인의 숫자가 확실히 늘었다. 나 또한 혼밥을 즐긴다. 사회생활에서의 식사시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업무의 연장'이었는데, 서로를 단절시켰던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온전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제 사람들은 상대방의 식사 속도를 맞출 필요도 없고, 대화의 주제를 고민하거나 침이 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신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이것 또한 흔적이다.



 언제부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 붙어있던 방역필름이 제거됐다. 식당에는 칸막이가 사라졌고, 가게들은 QR 기계를 없앤 지 오래다. 흔적들은 사라지고 있다. 몇몇 흔적들은 남아있지만. 


 시간이 더 많이 흐른 후, 기이하고 비정상적이었던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 사실은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기를, 그저 이상했을 뿐이라고 기억하게 될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면, 얼마 남지 않은 흔적조차 더 희미해지겠지만 그 흔적들로도 사람들은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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