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경영에서의 '어나더레벨'>
내가 삼성에 입사했을 때, 이미 삼성은 충분히 큰 회사였다. '패스트 팔로워'였지만, 흔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야기하는 '외계인 고문'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기술력과 상품 출시 속도를 통해 '글로벌'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기업이 됐다.
하지만 입사 이후 삼성은 그 전의 성장이 무색할 정도로 더, 더, 더 커졌다. 그 중심에 반도체사업부가 있다. 반도체는 일반 소비재와는 다른, 매우 특이한 속성을 지닌 상품이다. 삼성이 그동안 많은 매출과 이익을 쌓았던 B2C보다 B2B에 가까운 상품이다. B2C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B2C의 판매량은 결코 B2B의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 삼성의 반도체는 삼성의 경쟁사들조차 사용해야만 하는 원자재적 속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의 반도체가 지구를 점유하게 된 데는 [엄청난 투자에 근간한 기술력]과 [수요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생산력]이 큰 몫을 했다. 이런 움직임은 [초격차]라는 말도 안되는 전략에서 출발한다. 경영자들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면 위치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미래 투자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초격차 전략은 다르다.
가령 삼성과 경쟁하는 A라는 업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삼성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생산효율 증대를 통해 어렵사리 A라는 업체를 꺾는다. 그러면 여기서 일반적인 방향은 지금의 승세를 유지하기 위해 점유율을 더더욱 뺏어오고, 이미 확보한 점유율을 지키는데 초점을 맞춰야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격차 전략은 기술적 발전속도를 결코 늦추지 않는다. 점유율은 둘째 문제다. 기술적으로 A 업체가 아예 삼성을 따라잡길 포기할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초격차 전략이다. 즉, "야 저건 못이긴다"라는 심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오려는 의지 자체를 잃어버리도록. "하하, 우린 안될거야 아마."
실제로 하이닉스의 반도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임에도 삼성과는 2년 정도의 기술 격차가 있다. 하이닉스가 지금 정도의 기술 수준을 유지하며 개발에 주력할 때, 2022년이되면 2020년의 삼성 반도체 수준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하이닉스가 지구상에서 매우 상위 클래스의 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초격차 전략이 잘 맞은 모양이다. 이제 삼성과 경쟁하던 반도체 업체들의 목표는 [삼성의 기술수준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2위는 지키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삼성의 압도적인 반도체기술력은 결국 판매량과 점유율로도 이어졌다. 초격차 전략은 마치 ROI를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과감해보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는 결국 기술력과 시장점유율, 이익율까지 모두를 잡을 수 있는 원론적인 정답이었던 것 같다.
책은 초격차 전략만을 이야기하고 있진 않다. 저자인 권오현 부회장이 어떻게 회사생활을 해왔고, 어떤 철학과 자세로 경영했는지를 서술한다. 이 책을 처음 샀을 때는 별로 기대가 없었다. 보관하기 편한 양장본이기 때문에 산 이유가 컸을 뿐이다. 경영서적은 대부분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경영서적을 집필하는 CEO들은 스스로의 자부심에 가득차 있고, 본인이 정한 성공의 범주에 스스로가 들어가 있음을 뿌듯하게 여긴다. 대부분의 경영서적은 그런 '자뻑'들로 가득하다. 이 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의외로 이 책은 여타 경영 서적들과 달랐다. 물론 인텔을 꺾고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를 만들었다는 자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오현 부회장이 한국의 다른 경영자들과는 판이한 자세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해야 맞겠다. 그는 '삼성'이라는 초거대조직의 보수성과는 걸맞지 않게 '위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52시간 근무 제한' 같은 경영자들이 싫어할 법한 제도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을 몸서리치게 싫어하고, '칼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두꺼운 책이었지만 재밌는 사례들과 문장의 쉬운 구조로 예상보다 빨리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느낀건 '이런 사람이라서 [초격차]라는 전략도 실행이 가능했겠구나'라는 점이다.
삼성이라고 모든 경영자나 임원이 권오현 부회장같은 열린 사고와 기술적 이해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성에 속해 있고 직장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책으로 남겨진 훌륭한 전략과 마인드가 여타 삼성인들에게도 오래도록 남아 더 큰 회사, 더 많은 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회사, 더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회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