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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23. 2020

강원도 홍천군

장소프로젝트

 첫번째 페이지를 왜 굳이 홍천으로 열었을까. 달리 이유는 없었는데 그냥 홍천으로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천에서는 정말 많이 걸었다. 자의에 의해서든, 혹은 타의에 의해서든. 


 장교 교육(OBC)을 수료하고 배치받은 곳이 강원도 홍천이라는 곳이었다. 나는 '홍천'이라는 지명을 이 때 처음 들었다. 전국 군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 중 가장 거대한 곳이 홍천이다. 실제로 지도에서 홍천의 행정구역을 보면 어림잡아도 가로 폭이 강원도의 절반에 육박한다. 

 홍천은 정말 재미없는 도시다. 만약 홍천 출신의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화를 낸다고 하면 죄송하다. 물론 세상에 재미없는 동네, 마을, 도시는 없다. 내가 홍천에 머물렀던 시간이 군 복무라는 특수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홍천에서 혼자 오래도록 걸었던 기억들은 내 걸음의 기억들 중 인상적이고 긍정적인 기억들로 남아있는 편이다.


 소위 때는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중위로 진급하고 보직을 바꾸게 됐다. 대대의 참모 자리로 배치받게 되면서 내면의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여갔다. 인격적, 업무적으로 수준 이하인 상급자와 일하게 되면서 웃는 습관으로 숨겼던 예민함이 폐부부터 차근차근 나를 갉아댔다. 그것이 꼭 그 상급자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 상급자와 잘 맞는 사람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으리라.


 보통 자정에서 새벽 두 세시 사이에 퇴근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군 생활은 좀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는 자책들이 잠에 들기 전마다 감쌌다. 업무의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업무와 과정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게 우리 군이라면, 그걸 내가 바꿀 수 없다면, 안보를 위해 2년 반동안 모든 걸 걸어보겠다고 했던 다짐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스트레스들로 생활의 의미가 퇴색되어갈 때, 그래도 중심을 잡아준 건 동기들과 우두머리였다. 틈틈이 챙겨주는 동기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들에도 웃기는 장면들을 선사했다. 엄청나게 와일드했던 대대장은 업무량을 증가시켰지만 '그래 이게 진짜 나라를 지키는 일이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 결국 상급자 한 명 때문이었나보다.

 어느 순간부터 걷기 시작했다. 자정 근방에 퇴근하면 군복을 입은 채로 위병소를 나섰다. 홍천이다. 군 부대 말곤 주위에 아무 것도 없이 껌껌한 곳이다. 위병소 병사들은 놀라며 경례를 한다. 매번 운동하고 오겠다면서 나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병들이 나를 정상으로 생각했을리 만무하다. 달밤에 체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군복을 입은 채로 자정이 넘어서 운동이라니. 

 아무것도 없는 동네라 차도 잘 다니지 않는다. 귀에 이어폰을 넣고 음악을 들으며 정처없이 발을 움직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행군 때 중간 휴식처로 삼는 동네들을 지나고 있더라. 날씨와 무관하게 맑은 공기와, 비록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좔좔좔' 들리는 홍천강의 소리. '줄줄줄'이나 '졸졸졸'은 분명 아니었다. 그게 아무 의미도, 목적지도 없는 걸음이었는데, 그 무렵에는 큰 힘이자 용기, 위로, 스트레스 해소 등등 지금이었으면 '힐링'이라고 불렸을 걸음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새벽 세 시 정도에 퇴근한 날이 있었다. 다행히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던가 일요일이었다. 걸었다. 정처없이 걸었다. MP3로 음악을 듣던 시기였다. 저장했던 곡들이 한바퀴를 다 돌았다. 생각없이 논 옆 길을 걷고,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멀리서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아뿔싸. 그렇게 오래 걸었구나. 해가 올라오자 어둠 속에선 없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 시에 퇴근했으니깐 사실 나오기 전까지 15~16시간을 근무한 뒤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둠 속에서는 전혀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이유 없이 걸었다니.

 전역 후 서울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해봤다. 한 시간을 걷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울은 너무 환하고 사람도 많았다. 시간대도 비슷한 시간이었는데, 서울과 홍천은 달랐다. 왜 나는 칠흙같은 어둠 속을 걷는게 행복한 것인지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진 않는다.


 홍천읍내는 '읍' 치고 북적북적하다. 홍천군의 인구는 매우 적지만, 수 많은 군 부대들이 있기에 주말만 되면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PC방, 고깃집, 피자집, 카페, 패스트푸드점, 아이스크림가게 등등 모두 시골에 잘 없는 장소들이다. 머리가 짧은 갓 청소년을 넘긴 청년들이 갇힌 곳에서 분출하지 못한 에너지를 홍천읍 내에 주말마다 한가득 풀어놓는다. 읍내를 제외하면 거의 논과 산, 시골내음으로 가득한 홍천에, 이들의 주말이 살포시 젊음을 얹어 놓는다. 나는 분명 한적하고 어둡고 조용하다 못해 음침하고 적막한 곳을 걷길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이들 사이를 걸어다니면 또 다른 유형의 활기를 얻었다. 나 또한 군인인걸 이들도 알겠지만 사복차림으로 그 열기들 사이를 돌아다니면 제 3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외출, 외박을 나온 장병들의 모습은 마치 생사를 다투는 군인 같다. 아니, 군인이기 때문에 '마치'라는 수식어가 틀린 것일 수도.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을 단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불사의 각오를 가지고 있다. 연인과 있던, 동료 외출자들과 있던, 가족들과 있던, 그 각오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주말에 홍천 읍내를 걸어다니면 열기와 열정을 넘어선 엄청난 각오까지 함께 체득할 수 있다. 

 읍내 가장 접근성이 좋은 버스터미널로 들어가면 조금 다르다. 아침 이른 시각에 홍천버스터미널을 들어가면 군복들이 북적북적한데, 이들은 열기나 열정보다는 설렘을 가득 안고 있다. 설렘의 크기는 그들의 이마와 가슴팍에 달고 있는 계급장 작대기 수에 반비례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휴가는 소중하지만, 한 개의 작대기를 달고 있는 장병들의 휴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반대로 하루 종일 읍내를 구경하다 저녁 무렵에 버스터미널로 돌아가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아침의 터미널이 누군가를 보내는 장소였다면, 지금의 터미널은 누군가가 도착하는 장소다. 이곳으로 도착한 장병들은 각자의 부대로, 각자의 방법대로 서둘러서 돌아간다. 아침에 있던 장병들의 설렘은 사라진다. 주로 걱정,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들은 터미널과 읍내에서 필요한 소지품들을 구매하고 택시나 시내버스를 통해 그들의 생활관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교 동기들, 선후배들과 홍천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는 많지 않았다. 다만 볼링을 잘 치는 동기와 선배들 덕분에 볼링을 즐겼다. 성당을 같이 다녔던 한 살 많은 동기는 친절하게 볼링을 알려줬다. 운동신경이 없는 편이라 실력이 늘진 않았지만 읍내에 나와서 군대의 업무가 아닌 다른 '놀이'를 즐긴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을 주는 시간이었다. 자주 갔던 볼링장은 게임당 1500원이었는데, 여기서 볼링을 거의 처음 쳤던 나로서는 체감이 잘 안됐던 금액이다. 전역 후 서울로 돌아와서야 말도 안되게 저렴했던 가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1500원도 군인이어서 할인이 된 금액이었다. 

 서울에서 이들과 다시 조우하면 주로 식사 후 볼링장을 간다. 볼링비를 내지 않기 위해 죽기살기로 친다. 짧은 머리로 볼링을 치며 낄낄대던 시간들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나마 그 시절 몇 안되었던 행복한 순간들을 되새기게 한다. 홍천의 볼링장에서 볼링을 칠만큼 치고, 중대장 선배들의 차를 얻어타고 부대로 돌아오면 걱정과 아쉬움이 위병소를 통과하는 순간 훅 밀려왔다. 홍천터미널로 휴가를 복귀한 그 장병들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홍천은 탐험 정신이 들게 만드는 동네다.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거리뷰를 못 보는 곳이 꽤 된다. 큰 길 사이사이로 좁은 시골 길들이 맥락없이 등장하는 그런 동네다. 일요일에 미사를 보러 성당에 갈 때면 일부러 이런 길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송정 공소'라는 곳이 있었다. 공소는 성당이 생기기에는 인구 규모가 적은 곳에 세우는 성당 부속 건물 같은 곳이다. 걸어가긴 조금 먼 거리였지만, 당시의 나는 어디라도 걸어다니는 재미가 붙었던 때였다. 늦은 업무를 끝내고 새벽에 여길 찾아갔다. 빛도 없는 어두운 흙으로 된 언덕배기를 올라갔다. 슬레이트 지붕이 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뻗어있는 건물에 십자가 하나가 달랑 있었다. 썩은 나무로 된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살짝 밀자 삐걱 소리가 심하게 났다. 내부는 아무것도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고 당연히 불켜는 곳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십자가와 석상들이 살짝 윤기가 반사되어 보였다. 마치 불꺼진 과학실을 들어가는 것처럼 무서운 느낌이 들었는데, 이윽고 익숙해졌다. 의외로 긴 의자들은 먼지가 없었다. 여기서 기도를 하거나 묵상을 했던건 아닌데, 마치 게임에 나오는 특정 미션을 달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역 후에 여기를 다시 찾았다. 차를 타고 쉽게 언덕을 올라갔다. 밝은 대낮이었다. 건물이 부수어져 있었고 차가 두세대 있었다. 공터에 나무 기둥과 철골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인부들 몇명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소를 다시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다시 공소를 방문해보진 못했다. 인터넷에서 거리뷰를 검색해보니 깨끗한 공소 건물이 세워져 있다. 나는 홍천에서 군인들 이외의 사람들을 별로 본 기억이 없는데, 이렇게 공소도 새로 짓고 하는 걸 보면 분명 군인 이외의 세상도 그 곳에는 항상 존재해 왔었나 보다.


 홍천에서는 추웠던 기억이 강렬하다. 어떤 군인이나 추위를 견뎌야 한다. 그렇다쳐도 홍천은 타 부대들이 춥다고 인정하는 동네 중 하나다. 겨울 행군때는 펄펄 끓는 정수기물을 수통에 넣어서 출발했다. 그래도 금새 수통은 얼어버린다. 종종 신병들이 탄띠에 과일캔음료를 숨겨서 출발하기도 한다. 알면서 모른 척 해준다. 어차피 몰래 먹으려 캔을 까도 얼어서 먹을 수 없다. 

 제일 친한 친구가 군생활 중에 놀러왔던 적이 있다. 대대장의 너그러운 허락으로 이 친구는 부대 안에서 같이 묵을 수 있었다. 장교 숙소에서 이틀을 같이 있었다. 나는 그래도 홍천생활 2년차여서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 친구는 한없이 춥다고 욕했다. 물론 그 친구가 옷을 얇게 입고 있기는 했다. 저녁에 잠을 자려고 친구에게 침대를 내어줬다. 부대까지 놀러와 준 그 친구에게 내가 느낀 고마움이 얼마나 컸는지 헤아릴 수 없다. 군 숙소이기 때문에 이불이 하나 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이불을 주고, 나는 대대 건물로 올라가서 침낭을 가지고 왔다. 바닥에서 침낭을 펴고 몸을 뉘었다. 친구와 누운채로 떠들고 있는데, 이불을 덮어도 춥다고 하더라. 결국 이 친구는 점퍼를 입고 잠에 들었다. 지금까지도 그 놈은 홍천 얘기만 나오면 그 추위를, 그리고 나를 두고두고 욕하고 있다. 


 눈이 한 번 오면 자비가 없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부대였기 때문에 미리미리 눈을 치우지 않으면 큰 사고가 쉽게 났다. 특히 우리는 장갑차가 주력인 부대였다. 급하게 작전을 수행해야할 상황에서 눈이 있으면 장갑차와 같은 차량 장비들이 기동할 수가 없었다. 눈은 무릎 높이까진 어렵지 않게 쌓이곤 했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곳이 고향인 나에게 눈은 어느정도 '기다림'의 대상이었는데, 군 생활 이후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쓰레기' 정도로 마음이 바뀌었다. 전역한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오면 '홍천에서 군복입은 청년들이 개고생을 하겠구나'라는 걱정과 안쓰러움이 먼저 들곤 한다.


 자연인이 된지 수 년이 됐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때는 홍천을 간다. 자주 기회가 되진 않지만 이젠 군복을 벗은 상태에서 이 곳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그 시절 느꼈던 어려움, 무거움, 힘듦을 벗어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같지만, 20대 중반의 응축된 에너지와 분노를 그곳은 변화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홍천은 '비발디파크' 정도로 알려진 시골일 것이다. 여러 의미에서 나에게 특별한 그곳이 홍천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기억 속 발자국들이 홍천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다. 홍천은 계속 변할 것이다. 나도 계속 변하겠지. 그래도 그 발자국은 희미해질지언정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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