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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23. 2020

보이지 않는 자

TEXTIST PROJECT

 한 예비 신랑이 있었다. 그는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은 자신의 예비신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믿음과 신념으로 신부를 맞이했다. 신부는 그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예비신랑이었던 그는 기꺼이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이 아닌 아이를 온전히 아들로 키웠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가정을 지탱했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기록은 사라진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이야기다. 성경은 마치 '신의 뜻이니깐 당연하다'는 듯이, 요셉의 역할을 아무렇지 않게 적어두었다. 하지만 저 상황에서 누구라도 파혼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리 천사가 오고, 꿈에서 어떤 계시가 왔다고 해도 선뜻 행하기 어려울 일에 대해 성경은 어디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성경을 쓴 역사가들은 어느순간부터 요셉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종종 몇몇 일화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마리아와는 다르다.

 서사에는 주인공이 대업을 이루기 위해 지나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묵묵하다. 얼마 안되는 분량과 인지도에도 불만이 없다.

 어린시절 정말 재밌게 봤던 드라마는 태조왕건이었다. 200화에 달하는 분량을 한 주도 안 빼고 봤다. 개인적으로는 견훤(서인석 분)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좋았던 역할은 왕건이나 궁예가 아니라 복지겸이나 신숭겸이었다. 복지겸은 왕건의 거병 초기부터 말년까지 곁을 지켰다. 신숭겸은 왕건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태왕사신기에서는 광개토왕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고우충 장군을 좋아했다. 야인시대에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태 형님'이 좋았다.

 서사는 주인공을 주목하기 위해 도움 준 이들의 분량을 의도적으로 줄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 1명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잠깐 스치듯 도움주는 사람이 수백 수천이다. 주인공이 탄탄대로를 걷기 위해 희생한 이들 또한 그 질적 양적인 노력이 엄청날 것이다.
 이야기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마움 또한 스치듯 지나간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희생은 잊혀지고 모든 공은 주인공에게 돌아간다.
 민주화를 이뤄낸 사람들은 수만명이지만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상석에 앉게 된 사람은 많이 쳐줘도 몇 백이다. 경제위기를 이겨내고 전쟁으로 괴뢰를 막아낸 사람들 또한 수백만이지만 그 열매를 누리고 화면에 비춰진 사람은 많지 않다.

 천주교에서는 3월을 성 요셉 성월로 지낸다. 내가 신앙심이 깊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여느 때처럼 미사를 갔다가 사회자가 말해줘서 알았다. 아버지 요셉만 기릴 달은 아닐 것이다. 마침 이런 달이 있으니 보여지지 않는 이들에게 감사함이라도 갖고 살자는 마음을 먹었다.
 회사의 유리를 닦아주시는 분들, 쓰레기를 치워주시는 분들, 배송기사분들과 버스기사분들..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보이지 않게 주인공 개개인들을 돕고 주인공들을 위해 희생하는 분들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분들도 그분들의 삶이 그분들 스스로에게는 온전히 주인공이길, 그래서 기억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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