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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31. 2020

미완성

TEXTIST PROJECT

 어제 자기 전, 화장실에서 문득 괜찮은 글감이 떠올랐다. 그런 글감이 떠오르면 잘 만들어진 치즈마냥, 끊어지지 않고 머릿 속에서 문장들이 와르르 이어진다. 종이 몇 장 정도의 분량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문장은 유려하게 이어진다.
 사람은 연약한 동물이라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자, 피로함은 몸을 종이 앞이 아닌 침대로 이끌었다. 머릿 속에서 유려하게 쓰여진 문장들은 계속 머릿 속에 남아있었는데, '글이 잘 쓰였구나'라는 흐뭇함이 잠에 드는 와중에도 이어졌다. 머릿 속의 글은, 종이로 옮기기만 하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만족스러울 것 같다는 평가까지 제멋대로 내리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옮기려 마음먹었던 글은 종이 앞에 앉자 하얘졌다. 글감으로 떠올랐던 제목을 적고, 첫 문장을 적었더니 더이상 쓰여지지 않았다. 많은 경험상 이렇게 쭉 이어지지 않는 글은 더 안쓰여질 뿐더러, 억지로 흐름을 밀고 나가도 재미없고 못 볼 글로 남아버린다. 억지로 몇 문단 만들다가 종이를 뒤집었다.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유려한 글은 머릿 속에서의 만족감만을 기억으로 남겨준 채, 정작 글 자체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다시 떠올라서 쓰더라도 그 글감으로 만족스러웠던 그 흐름은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아무도 읽어보지 못해서 잘 쓰여졌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어져버린 글은 글쓴이조차 쓴 적이 없고 읽은 적이 없다. 머릿 속에서 잘 쓰여졌다고 만족하며 희미하게 웃어넘긴 허섭함과 간사함이 스스로를 꾸짖고 있다. 결국 이 글은 좋은 글을 떠올렸음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좋은 글을 떠올리고도 쓰지 못한 질책의 기록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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