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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n 10. 2020

그 방

TEXTIST PROJECT

 외갓집은 옛날 슬레이트 지붕의 낮은 시골집이다. 방이 하나 있지만 요즘 아파트들처럼 어디가 방이고 어디가 거실인지 구분이 확연하진 않다. 화장실도 밖에 있는 그런 구조.


 어쨌든 그 하나 있는 방은 길쭉하다. 가족들이 명절에 외갓집을 방문하면 그 방에서 잔다. 명절은 보통 9~10월이거나 1~2월이니깐 일교차가 크거나 아예 매우 춥다. 자려면 어쨌든 보일러를 틀어야 한다.
 외갓집의 구조는 신기하다. 부엌은 사람 허리 높이 정도를 내려가야 되는 구조다. 보일러는 현대식이지만 집의 구조가 옛날식이다보니 구들장의 공간이 존재하면서도 현대식 보일러가 그 틈안을 파고들게 된다.
 보일러를 틀어놓으면 방은 금새 따뜻해진다. 그리고 뜨거워진다. 이게 참 신기한게, 보일러는 분명 현대식 아파트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기계라는 점이다. 아파트에서는 보일러 때문에 바닥이 뜨거워서 손발을 오랫동안 대고 있기 어려웠던 적은 없다. 하지만 외갓집은 같은 보일러지만 훨씬 뜨겁다.

 이렇게 온도가 뜨거워진 외갓집의 방에 이불을 깔면, 따뜻함을 유지해준다기보다는 화상을 방지해주는 역할처럼 느껴진다. 불처럼 뜨거워진 바닥은 맨발로 디딛으면 걸음걸음마다 장판이 쩍 붙었다가 떨어진다.
 방이 세로로 긴 형태인지라 가족들이 한 방에 누우려면 가로로 누워야 한다. 방에는 장롱들이 있기 때문에 반듯한 자세로 다리를 쭉 뻗으면 반대편에 다리가 닿는다. 좁다기보다는 딱 맞다.
 이불에 몸을 넣으면 마치 애벌레처럼 몸이 말린다. 불처럼 뜨거운 바닥을 깔린 이불이 따뜻함으로 중화시켜준다. 덮는 이불은 맨들맨들하고 폭신하다.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는 베개의 낡은 색깔을 눈으로 느끼기 전에, 이미 잠은 몸을 덮쳐온다.

 외갓집의 이불은 '폭신'하다. '푹신'한 것과 다르다. 나는 천에 대해 무지해서 그 소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수 많은 책들에서 읽었던 '비단결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비록 외갓집의 이불이 비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불에 붙이리라. 늘상 외갓집의 이불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잠에 드는 동안에 깔려 있는 이불의 아래로 손을 넣으면 장판의 불같은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구역을 찾으면 옆에 누워있는 동생에게 "여기 손 넣어봐"라며 꼭 안내해주곤 했다. 아마 부모님이 같이 누워계시지 않았더라면 손이 바닥에 닿자마자 "어우, XX"하며 감탄사를 내뱉었을게 틀림없다.
 고작 일 년에 한 두번 가게 되는, 가깝지 않은 곳인데 외갓집의 그 방에서 이불 속에 몸을 넣으면 한없이 안락하다. 불처럼 뜨거운 바닥 때문인지, 깔린 이불의 적정한 온도 때문인지, 덮는 이불의 '폭신'함 때문인지, 긴 형태의 방 구조 때문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외갓집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잠이 덜 깬 상태로는 화장실을 찾아가기 어렵다. 화장실이 밖에 있고,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신어야 해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쯤이면 몸은 이미 '그래, 나는 일어난 것이 맞아.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갈 수 없어.'라며 순응하고 있다.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없다. 쭈그려 앉아서 세수하고 이를 닦는다. 화장실에서 나와 마루를 올라서면 이미 아침상이 차려지고 있다. 보통 외갓집에서의 아침은 무국과 깍두기가 꼭 올라온다. 이불 속에서 경험한 무릉도원의 마침표는 아침식사와 함께 찍어진다.

 일상에 몸을 뉘이면 머리가 아픈 날도, 가슴이 답답한 날도 많다. 회사에서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일, 주변 사람들과의 트러블, 잘 풀리지 않는 게임, 써지지 않는 글귀들, 그냥 막연히 삶은 참 힘들구나 하는 수 많은 잡념들까지. 그렇게 하루를 끝내면 몸을 씻어도 개운치 않고, 침대에 누워도 목젖까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막혀있다. 이불은 가시같고 베개는 돌덩이 같다.
 그럴때면 외갓집의 뜨거운 장판과 폭신한 이불과 좁은 방이 생각난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락함을 제공하는 바로 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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