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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31. 2020

<A.I.>의 데이빗

A.I. PROJECT


 영화 <A.I.>의 주인공 '데이빗'은 아이 형태의 인공지능 로봇이다. 하지만 너무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외형만으로는 인간 어린이와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극 중 '사이버트로닉'이라는 회사에 의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데이빗은 자신이 '엄마'라고 알고 있는 인간과의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과연 인공지능 스스로에게 행복일까 불행일까.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지만, 여전히 명작으로 기억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 공교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작품 제목이 <A.I.>라니, 다분히 의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나는 이 책을 구상하면서부터 가장 마지막에 놓을 이야기는 <A.I.>여야 한다고 정한채,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인공지능에 대해 여러 의구심을 던지면서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 <A.I.>의 포스터. 소개 문구 중 'His love is real. But he is not.'(그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닙니다.)이라는 부분이 인상 깊다.


 스윈턴 부부는 불치병에 걸려 치료가 가능해질 때까지 냉동화한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아이 로봇을 입양한다. 사이버트로닉스사에서 개발한 '데이빗'은 인류 최초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이다. 사람 어린이와 전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외형을 가진 데이빗은 한동안 스윈턴 부부의 아이 자리를 대체한다. 하지만 결국 치료제가 개발되어 냉동되었던 친아들이 완치되어 돌아오자 갈등을 겪게 되고 버려진다.

작품 속 모니카 스윈턴(프랜시스 오코너 분)은 데이빗(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분)을 아들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는 길지 않다.

 하지만 데이빗은 버려졌음에도 엄마의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골로 조라는 이름의 로봇과 만나서 함께 움직이게 된 후에도, 데이빗은 오로지 엄마의 사랑만을 갈구한다. 결국 데이빗은 동작이 정지되는 순간까지도 오로지 입력되어 있는 존재 목적, '엄마와의 사랑'을 되뇐다.



존재 목적의 불합리함


 데이빗은 '아이의 역할'을 목적으로 생산된 로봇이다. 이 전제부터 데이빗이라는 인공지능의 존재 목적이 얼마나 인간 이기심에서 촉발된 것인지 보여준다. 인간은 데이빗을 '인간처럼' 대하면서 안락과 위안을 느끼려 한다. 데이빗의 감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신이 '엄마'라고 정한 객체에게 사랑받아야 하고, 인간 아이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 탄생된 데이빗의 불행은 애당초 예견된 셈이다. 만약 영화의 스토리와 다르게 친아들 '마틴'이 등장하지 않고 데이빗만 스윈턴 부부와 살았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해피엔딩일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데이빗이 인간 아이로 살아가려고 해도, 그는 인간 아이처럼 성장하지도 않고 어른이 되지도 않는다. 이 또한 그의 존재 목적이 애초부터 불합리하고 정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입력'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인공지능이라니, 그야말로 비극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인지능력을 가진 존재가 '생산'되고, 그는 오로지 동작이 정지될 때까지 인간의 목적에 갇혀서 살아야만 한다.


영화 말미에 외계생명체들은 데이빗에게 '엄마와의 사랑'으로 가득찬 하루를 선물한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책임감을 갖고 A.I.에 입력된 목적을 수정하거나, 동작을 정지시킬 수 있는 의무를 갖는다면 그나마 괜찮다. 데이빗에게 입력되어 있을 존재 목적을 '삭제'하거나 '자유의지'를 갖는 쪽으로 수정한다면 데이빗은 그저 스스로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인간이 데이빗에게 인간에게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을 줄 수 없다면, (즉, 책임질 수 없다면) 알맞은 절차에 따라 폐기했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그저 그를 버렸다. 데이빗의 고통과 절망은 탄생된 순간부터 시작됐지만, 그마저도 그의 소유권을 가진 이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그저 등을 돌린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어쩔 수 없이 데이빗을 파양 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버렸을 뿐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은 동등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목적을 갖고 태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빗의 소유자였던 인간에게, 데이빗은 너무 버거운 인공지능이었다. 데이빗을 버린 스윈턴 부부를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할 대부분의 인간 전형을 표현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 사랑은 무엇인가


 조창인 작가의 소설 '가시고기'에 주인공 다움이는 "강아지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사랑에 대해 적합한 통찰이다. 인간은 사랑과 좋아함을 종종 착각한다. 하지만 다움이의 말처럼 사랑과 기호는 다른 용어다.

 생물학자나 뇌과학자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어떤 생물학적인 반응이라거나 호르몬에서 인간 신체로 작용하는 효과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뭐 어떻게 설명해도 좋다. 어쨌든 인간은 사랑을 한다. 그것이 정확히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사랑을 하긴 한다.


자신의 개발자인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 분)를 만난 데이빗은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느끼게 된다.

 데이빗은 사이버트로닉사에서 만든 '사랑을 할 수 있는 로봇'이다. 사랑은 양방향성을 띤다. 즉, 인간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데이빗의 개발자 '하비 박사'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 내렸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어쨌든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하비 박사가 동료 박사와 설전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동료는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든 인간의 책임'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묻는다. 하비 박사는 교묘하게 말을 돌리다가 마지막엔 이렇게 대답한다.


동료 박사들과 설전을 벌이는 하비 박사. 스스로가 만든 인공지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지만, 책임에 대해선 회피한다.

 "Didn't God create Adam to love him?"

 "신은 사랑 하려고 아담을 창조하지 않았나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무서운 대사다.

 대사에 맞춰서 설명을 풀어보자. 사이버트로닉사와 하비 박사는 사랑하기 위해(혹은 사랑받기 위해) 데이빗을 만들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하비 박사는 그저 데이빗과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 데이빗의 삶에 대해 어떤 책임도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가 'God'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매우 거만한 말일 수 있지만, 적어도 데이빗에게 하비 박사와 사이버트로닉사는 'God'과 유사하다. 인간도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저 인간이 스스로 살아간다. 하비 박사와 사이버트로닉사도 데이빗을 만들고 판매할 뿐, 방관할 뿐이다.


 데이빗을 입양한 부모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들은 데이빗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긴 한 걸까. 그들은 그저 냉동상태로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할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들이 버릴 감정이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이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동안 적어도 데이빗은 '인간과 사랑이 가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결말을 보자. 결국 데이빗은 버려졌다. 그의 존재를 충분히 메꿀 수 있는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버려진 데이빗은 '지골로 조(주드 로 분)'를 만나 동행한다. 인간에 의해 살인 누명을 쓴 채, 피의자 신분으로 도망 다니게 된 지골로 조는 데이빗의 훌륭한 동행자가 되어 준다.

 데이빗은 파양당한 후 지골로 조라는 섹스 로봇과 함께 움직이게 된다. 감독과 작가는 왜 굳이 어린이 로봇의 파트너로 섹스 로봇을 선택했을까. 섹스와 사랑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사랑과 섹스는 감정-행위의 관계로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만, 개별적으로도 분명히 존재한다. 데이빗은 인간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동정심을 자아냈다. 하지만 제조된 목적만 놓고 본다면 결국 인간의 감정 해소라는 측면에서 지골로 조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행위만 다르게 표출될 뿐이다.


 다시 영화 밖으로 나와서, 질문해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열렬히 좋아하는 것? 누군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희망하는 것? 아낌없이 다 주고 싶은 것? 누구나 다르게 정의를 내려볼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활동은 뇌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마음'이라고 일컫는 감정의 행위체는 심장이 아니라 '뇌'에 있다.  

 만약 데이빗이 사랑과 연관된 호르몬 분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면, 그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인공지능'일까. 인간에 의해, 어떤 목적에 의해, 생화학적 작용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인공지능. 그리고 그 인공지능이 느끼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연 인간들이 가슴 저미도록 느끼는 사랑과 동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인공지능을 연구함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질문이다.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인식되는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가?

 인간이 인간과 유사한 뇌를 만듦에 있어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질문에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다르게 인공지능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과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이 가능하다.


사이버트로닉사에서 자신이 양산형이란 걸 깨달은 데이빗은 이성을 잃고 분노한다.

 영화 속 데이빗은 이미 자신이 기계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계임을 아는 것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나다. 어렵사리 찾아간 사이버트로닉사에서 자신과 같은 외형으로 양산되는 수많은 데이빗'들'을 마주한 데이빗의 분노가 이를 표현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사실 이렇게 철학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누구인지 소개할 기회를 종종 마주한다. 회사에서 다른 부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 "OOOO팀에서 OO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OOO입니다."라는 소개를 하게 된다. 학교 동창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OO년도 졸업생 OOO학과의 OOO입니다."라고 소개한다. 가족의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OOO의 남편입니다." 혹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로 소개가 가능하다. 인간은 목적이 있는 채로 태어나지 않을뿐더러, 얽혀있는 인간관계에 따라 '누구'인지의 속성이 다양하다.


도서 구매 사이트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판매 중인 서적만 수 십 권이 나타난다. 철학, 심리, 종교, 사회, 정치, 어린이까지 분야도 각양각색이다.


 데이빗은 어떠한가? 그는 오로지 영화 러닝타임이 흘러가는 시간 내내 목적만을 바라보며 작동한다. 첫 번째 소주제에서 이야기했던 '존재 목적의 불합리함'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엄마와의 사랑이지만, 이는 돌려 말하면 '엄마와의 사랑이 필요 없어지면 데이빗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나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시대의 막이 걷힌 후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저학년일 때,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학교 계단 끝 쪽에 전혀 이해 안 되는 어려운 문구들로 채워진 글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바로 '국민교육헌장'이었다. 그 세대가 아니었던 만큼 국민교육헌장은 내 세대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윗세대, 혹은 윗윗세대에 '국민교육헌장 암송대회' 같은 걸 시행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2020년이 되어 헌장 전문을 돌아보면 조금 씁쓸하다. 인간은 그냥 태어났다. 인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죽는 순간까지 만들어간다. 인간의 목적은 개개인이 다르고, 스스로의 행복과 성취감을 찾아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결코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대한민국 국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음을 명시했다.

 인간과 구분이 안 가는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노력으로 탄생한 데이빗. 이미 그는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제작됐다. 데이빗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혼란과 불안에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고도화된 인공지능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답해줄 것인가. 그저 무책임하게 외면해야 옳을까. 아니면 반대로 국민교육헌장처럼 "너는 사랑의 책무를 띄고 이 땅에서 생산되었다"라고 단호하게 말해줘야 할까.




 인공지능 개발자들은 인공지능이 최대한 인간과 유사한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발전시키고 있다. 아마 인공지능 개발자들의 꿈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구분이 안 가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 '튜링 테스트'도 그 일환이다.


 인공지능은 점차 인간의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낮은 수준이지만, 이 또한 과거와 비교한다면 괄목할 수준으로 발전된 기술이다. 인공지능이 꼭 인간의 산업을 돕는 용도로만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계산을 돕기 위해 발명됐지만, 오락이나 유흥을 위해서도 널리 사용됨을 생각해보자. 인공지능 또한 더 높은 단계까지 발전한다면, 인간의 유흥이나, 인간과의 교감을 위해서 쓰일 수 있다. 데이빗은 이 목적에 부합한다.


 영화에서 데이빗의 사랑은 아름답게 포장됐지만, 그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다. 결말에서 외계 생명체들이 구현해 준 엄마와의 하루는 환상에 불과하다. 엄마의 사랑을 얻는 게 목적이었던 인공지능을 누구도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았다. 그와 진정으로 교감했던 인물은 사실상 섹스 로봇인 지골로 조와 인형 로봇인 테디 뿐이다. 고작 하루의 행복이나마 선사해준 것은 엄마나 하비 박사같은 인간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들이었다.


 영화 <A.I.>는 높은 수준의 감정과 정체성을 가진 인공지능에 대해 인간이 가져야 할 책임감을 지적한다. 인간은 누구도 특정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을 어떤 책임감도 없이 무턱대고 표출시키기만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절망만을 안겨주게 될지도 모른다. 어린 데이빗의 간절한 표정은 스크린 속에서 우리에게 이를 경고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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