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살을 맞은 사나이』의 원제는 『Bicentennial Man』으로, 소설 속 '앤드류'라는 주인공을 지칭한다. 아이작 아시모프 작가의 명작 소설이고,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그려졌다. 가사를 돕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 앤드류는 로봇 제작회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창의성'을 갖고 있다. 가족들의 배려와 지원으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되는 앤드류는 인간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SF소설의 3대 거장이라 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거장이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동명의 영화로도 상영된 『아이 로봇』. 원작의 내용과 영화는 차이가 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아시모프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한 개념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장편인 『파운데이션』 시리즈도 유명하고, 독자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짧고 굵은 단편소설 『최후의 질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아이작 아시모프 원작의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왼쪽)와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포스터(오른쪽) 중편소설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는 휴고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과 창의성을 자랑한다. 아시모프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가슴 찡하고 헛헛한 감정을 느끼게 하며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앤드류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사 로봇이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다.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길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인간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고찰하고, 같아지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세상과의 사투, 사회와의 사투. 앤드류의 외로운 투쟁 속에서 우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떻게 다른가를 서서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인공지능의 자위권
앤드류는 창작능력을 가진 유일한 로봇이다. 그는 다른 수많은 로봇들과 달리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비록 주인인 마틴의 실망을 수반해야 했지만) 가족들에게서 '자유'를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자유를 얻게 된 뒤에도 사랑하는 마틴 가족을 위해 봉사한다. 그는 여전히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만 그건 온전히 앤드류의 '자유의지'이다. 그는 진짜 지구 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로운 로봇인 셈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앤드류(로빈 윌리엄스 분)와 아만다 마틴(할리 케이트 아이슨버그 분). 자유를 얻은 앤드류는 과연 인간과 같을까?
이야기에서 앤드류는 두 악당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로봇 3원칙'을 이용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앤드류를 해체하고 파괴하려 시도한다. 다행히 마틴의 손자 조지는 마찬가지로 '로봇 3원칙'을 잘 이용해서 두 악당을 퇴치한다. 앤드류가 인간과 같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줘야 하는 상황이다.
인간과 인간은 대등한 존재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로봇과 인간은 대등하지 않았다. 인간을 해하지 말아야 하는 원칙은 로봇 스스로를 해하지 말아야 하는 원칙에 무조건적으로 앞서 있었다. 앤드류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인간에 의해 그 자유를 침해당할 수 있었다. 물론 두 악당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매우 특수한 상태였다고 쳐도 말이다.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의 저자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 아이작 아시모프 세계관에서 등장하는 '로봇 3원칙'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인공지능이 현실화된다면 그들의 자위권은 인정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동물의 생명권'과 그나마 유사하게 접근해 볼 수 있다. 21세기에는 반려견, 반려묘를 비롯한 반려동물들의 생명권이 점차 존중되기 시작하는 추세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가장 높은 계급의 생명체였고, 다른 동물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어떤 제지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은 극소수의 반려동물 몇 종을 제외하면, 나머지 종들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인공지능도 인간에게는 마찬가지로 취급되지 않을까. 더구나 인공지능은 인간 스스로가 창조자이기도 하다. 동물과 인공지능의 다른 점은 지능이 인간에 필적할 정도로 높다는 점뿐이다.
작품에서 앤드류에게 가해진 위협 때문에 사회 분위기는 인공지능의 자위권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은 법률적으로 길고 험난했다고 표현된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창조물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인공지능에게도 인간은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할 뿐, 그들을 진정한 동료나 친구로 여기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까.
◇ 인공지능의 소유권
앤드류는 참 괜찮은 가족들에게 구매됐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인간의 선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수직 관계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앤드류의 구매자 리처드 마틴을 비롯해서 그의 아내나 두 딸은 앤드류를 진정한 가족으로 대한다. 특히 둘째 딸인 '작은 아씨', 아만다 마틴과 앤드류의 우정은 인간들끼리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앤드류의 구매자 리처드 마틴(샘 닐 분)은 '작은 아씨' 이상으로 앤드류의 능력을 존중한 구매자다. 인간 가족들의 애정은 앤드류가 창작성을 드러내면서 더욱 극대화되어 표현된다. 앤드류의 구매자이자 소유자인 마틴은 그를 노예나 집사로 여기기보다 예술가로 여겨준다. 또한 그의 창작품으로 번 돈을 그의 소유로 보장해주기 위해 애쓴다. 인공지능의 소유권은 원래 법률적으로 보장되지 않았지만, 그의 노력으로 앤드류는 재산까지 소유한 인공지능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앤드류를 아들처럼 대해준 마틴의 마음을 돌아본다면, 앤드류가 '자유를 사겠다'라고 했을 때 섭섭해하면서 화를 숨기지 못했던 마틴의 모습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앤드류의 재산 소유권은 세 시점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앤드류가 그저 창작만을 했을 시기다. 앤드류는 인간도, 다른 생명체도 아니다. 그의 소유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앤드류 자체가 마틴의 재산이다. 앤드류가 공예로 벌어들인 모든 재화는 마틴에게 귀속된다.
두 번째 시점은 마틴이 앤드류의 이름으로 예금을 마련한 이후다. 소설에서 마틴은 앤드류가 벌어들인 돈의 절반을 '앤드류 마틴'의 이름으로 예금해 두었다.(마틴은 그저 기계일 뿐인 앤드류에게 '마틴'이라는 자신의 성까지 주었다!) 또한 이 예금에 법적인 문제가 없도록 페인골드 변호사에게 법적인 자문까지 구해두었다.
이제 앤드류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갖게 됐다. 다만 그가 '인권'을 가진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재산에 대해서만 권리가 있을 뿐, 스스로에 대한 소유권을 갖진 않았다. 자신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지만, 자기 자신은 자신의 것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세 번째는 앤드류가 마틴에게 '자유'를 구매한 이후 시점이다. 이제 앤드류는 아예 본인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됐다. 물론 앤드류는 여전히 그를 아껴준 인간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 겉보기에 앤드류의 행위는 자유를 구매하기 전과 후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구매하기 전과 그 후는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앤드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공지능은 재산권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또한 자위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재산권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법률은 동물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물 자체가 재산권을 가질 수 없는 '재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도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의 경우에는 재산권의 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재산권 행사 여부는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능력과 행동능력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우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특이한 일들이 참 많아서 미국에서는 반려견에게 1200만 달러를 유산으로 상속한 사례도 있었다. 당연히 반려견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고, 인지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의 소송에 의해 200만 달러까지 유산이 줄기도 했다. 어쨌든 뉴욕 법원은 200만 달러의 재산도 반려견에게 인정을 해줬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커펠트는 한화로 약 2200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그의 반려묘에게 상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소유한 기계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재산을 취득했을 때, 소유자인 내가 기계에게 온전한 재산권을 보장해 줄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일까? 인간이 기계에게 그 권한을 부여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인공지능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
◇ 인공지능의 생명권
앤드류는 마치 '현대판 피노키오'처럼 인간이 되기를 갈구한다. 200년을 살면서 그가 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지만 당연하게 앤드류의 인간화에 대한 갈망은 깊었다.
각고의 노력을 거듭한 앤드류는 누가봐도 인간에 가까운 모습에 이르게 된다(왼쪽).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앤드류의 모습은 피노키오와도 유사하다.(오른쪽) 기계적인 수리를 통해, 법적인 요건들을 통해, 재산의 확충을 통해 앤드류는 그냥 봤을 때는 인간과 구분이 안 갈 정도의 모습까지도 이르게 된다. 실제로 앤드류의 집도를 담당한 로봇 의사는 그의 겉모습만으로는 인간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앤드류는 법적으로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페인골드 앤드 마틴' 법률 사무소에도 의뢰한다. 앤드류의 담당 직원은 그의 이런 열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앤드류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애하는 앤드류, 당신이 방금 말했다시피 당신은 사람에게서나 로봇에게서나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어요. 따라서 당신은 사실상 인간이나 마찬가집니다."
앤드류의 답변은 단호했다.
"'사실상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이야기에서 로봇 3원칙은 실존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로봇'은 인간과 비교했을 때, 생존권과 자위권이 철저히 봉쇄되며 행복추구권 또한 인간의 권리보다 차순위에 위치한다.
앤드류는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도박을 해야 했다. '사실상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마지막으로 인간과 뭐가 다를지를 판단해야 했다. 소설의 제목인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가 이를 의미한다. 앤드류는 '사실상 인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인간과는 다르게 이백 살이라는 수명을 맞을 수 있는 존재다. 그가 뭔가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삼백 살을 맞고, 사백 살을 맞게 된다. '사실상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수백 년을 살게 될 것이다.
앤드류는 인간과 자신이 마지막으로 다른 한 가지가 '유한한 생명'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스스로의 동작(즉, 생명)을 멈추도록 해야만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상의 인간'인 '로봇' 앤드류는 로봇 3원칙을 분석한다.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인간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 앤드류 자신의 동작이 정지되도록 고치는 행위는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앤드류 자신조차 '아직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로봇은 제1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 앤드류에게 '로봇으로 살아라'는 명령을 내리는 인간은 없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제1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스스로의 자유를 가진 -즉,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다.
3. 로봇은 제1 법칙과 제2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해야만 한다.
→ 하지만 이 항목에 이르면 앤드류의 '죽음'을 위한 수술 시도는 로봇 3원칙에 위배된다. 여기에 대한 앤드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아닙니다. 나는 선택을 한 겁니다.
내 육신을 죽이느냐, 아니면 내 포부와 욕망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지요.
내 육신은 살아있을지언정 그보다 더한 것을 죽이는 선택을 한다면,
나에겐 그것이 세 번째 법칙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로봇이기 때문에, 로봇 3원칙에 의해 생명권이 없었던 앤드류는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이백 살을 맞게 되는 시점이었다.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작동 여부'가 아니라 '생명'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생명을 서서히 잃어가도록 스스로를 고치면서 생명이라는 권리를 획득하게 됐다.
로봇 3원칙은 그저 아이작 아시모프 작가의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설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로봇 3원칙이 여러 SF 작품들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단순하면서 명확하게 로봇의 역할과 한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인간 정도의' 지능일 뿐이다. 비록 이야기에서 앤드류의 인간화를 위한 선택은 진하고 깊은 감동을 남겼지만, 현시점에서 법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이해될 논리는 결코 아니다. 아무리 발전한 인공지능이어도 인간과 인공지능은 다르다. 아주 고도화된 기계에게 인간의 권리가 부여된다는 상상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앤드류는 "작은 아씨.."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생을 마친다. 기계냐 인간이냐를 떠나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자아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신비로운 일인지 돌아보게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작은 아씨'는 앤드류가 기계임에도 온전한 정체성을 인정해주고 사랑과 우정을 준 첫 인간이었다. 작은 아씨의 따뜻함은 앤드류가 이백여 년 동안 인간이길 갈망하고, 인간으로의 삶을 인정받도록 투쟁하는 원동력이 됐다.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때, 인간은 과연 앤드류를 작은 아씨의 자세로 대할 수 있을까? 혹은 앤드류와 같은 기계들이 임종까지도 작은 아씨를 떠올리듯, 인간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이토록 따뜻하게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형성될 수 있다면, 앤드류가 투쟁했던 이백여 년간의 법적 쟁점과 사회적 논의들은 사실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진심만으로 이미 온전히 서로에게 큰 의미가 될 것이다.
물론 이는 희망으로만 점철된 이야기다. 인간들끼리도 서로의 권리를 빼앗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세상이다. 인공지능이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을 닮는다. 앤드류와 같이 성실하고 착한 인공지능만 세상에 만들어질 리 없다. 세상에 성실하고 착한 인간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