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좋은 날> 서울 문학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다들 터미널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본 경험이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급해서 눈앞에 보이는 아무 택시에 올라타면 “아, 앞에 택시들 쭉 줄 서 있는데 이렇게 중간에서 타면, 내가 새치기한 셈이라 나중에 욕먹는데”라고 툴툴거리는 기사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런 기사님의 눈치를 보고, 기사님은 다른 택시 기사님의 눈치를 본다. 옛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김첨지는 비를 맞으며 빈 인력거를 끌고 돌아가기는 싫지만, 정거장 주변에 상주하는 인력거꾼이 부리는 텃세는 겁이 난다. 그래서 남대문 정거장 앞 전차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인력거를 세워두고 그 근처에서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첫 번째 호객에는 거칠게 거절을 당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김첨지가 아니지. 계속 기회를 엿보다가 전차에 타지 못한 사람을 발견하고 얼른 인력거를 타라고 꼬신다. 김첨지는 그 손님이 매우 큰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고 아마도 차장에게 쫓겨난 거 같다고 짐작했다. 근데 이거 너무 이상하다. 요즘에야 평일에 지하철에 자전거를 들고 타려고 하거나, 버스에 뚜껑 없는 컵을 들고 타면 제재를 당할 수도 있지만, 가방이 크다고 쫓겨나다니. 어쨌든 혼자서 들고 다니는 정도의 가방인가 본데 그게 크다고 쫓아낼 만큼 차장의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건가. 도대체 경성의 전차 차장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야박한 것인지 화가 치민다.
경성에 맨 처음 전차를 들여오게 된 사람은 미국인 콜브란이었다. 하지만 전차 궤도 부설에 관여한 설계자와 기술자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기술자와 함께 운전사들도 전부 일본의 경도전철에서 일했던 일본인이었다. 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 당시 차량 대수가 일반 전차 8대에 황제 전용차 1대였기 때문에 일본인 운전수 10명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통 일주일 만에 탑골공원 부근에서 전차에 어린이가 치이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가뜩이나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해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던 터라, 일본인이 사고를 냈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매우 분노했다. 사람들의 폭행 위협 때문에 일본인 운전사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3개월 정도의 시일이 흐른 후에야 도착한 미국인 운전사들로 대체되었고, 1899년 9월부터 1904~5년까지는 전차는 미국인 운전사에 의해서 운행되었다.
이렇게 초창기의 전차는 미국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용된 승무원들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먼저 채용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은 집안의 출신이었겠지. 그렇다 보니 이 사람들은 우월의식이 유독 강했을 것이다. 이런 우월의식은 신분 자체 때문이기도 했지만, 승객들이 새로운 문물인 전차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선에서 오는 상대적 우월감도 있었을 거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은 단순히 전차 승무원을 동경의 눈빛으로 보는 것을 넘어 자신이 승무원이 되고자 노력했다. 전차 사업이 안정화된 1920년대 이후에는 회사 내부에 승무원 모집 공고를 한다고 게시했다. 공개모집은 아니고, 일주일이나 열흘 동안 붙어있던 게시물을 본 직원의 지인이나 친척들이 알음알음으로 지원했던 것인데도, 매번 응시자는 넘쳐났다. 1924년 6월에는 단 27명을 뽑는 자리에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원했다. 당시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선망하던 직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은 학력, 나이, 체력조건에 대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차장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원자가 많았던 만큼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차장의 수험은 이번으로 세 번째, 앞의 2회도 산술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이번 일 년 반 동안 과자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천천히 공부하였다. 산술의 자습서를 풀면서 스스로 노력했다. 시험장에서 문제를 봤을 때는 낙관과 불안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수년 동안 희망했던 차장으로 합격한 것을 생각하면 기쁘고 또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1931, <제37기 승무원 채용 개황> [경전휘보] 5권 4호. 경성전기주식회사. 26쪽
기사의 출처인 [경전휘보]에는 정말 재밌는 기사가 많은데, 전차 진상손님의 유형을 삽화로 설명한 기사도 있다. 진상 중 하나는 심한 애정행박을 벌이는 커플로 꼽았다..! 지금의 지하철 진상 손님의 유형과 거의 비슷해서, 사람 사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싶다.
어찌됐든 이렇게 힘들게 전차 승무원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그건 아니었나 보다. 전차승무원이 초급으로 하루에 평균 1원 50전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기계기구업처럼 숙련이 필요한 공장노동자가 평균적으로 1원 13전 정도를 받았다고 하니 뭐 그리 엄청나게 고소득 직종은 아니었다. 김첨지만 해도 동광학교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 학생 손님을 태워 드리고 한 번에 1원 50전을 벌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 학생은 얼마나 부자인 거지? 직장인이 하루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을 한 번의 인력거비로 쓸 수 있다니. 빈부격차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아무튼 원래 전차승무원들이 규정대로 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그리 고소득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 지각 여부 등에 따라 공제되는 돈도 많았나 보다. 1920년대에는 이미 전차가 낡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운전사나 차장이 이에 대해 벌금을 물거나 인격적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3년 차 승무원이 남긴 글을 보면 나의 텅장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흐윽.
매삭 수입되는 돈은 대개 삼십 원 내지 삼십오 원 가량이니 그 돈을 가지고 집세 내고 쌀 팔고 나무사고 월수 내고 신원보증금까지 내고 나면 늙은 어머니의 찬밥 점심거리나 어린 아들의 월사금 연필값 등은 다시 빗을 얻어야 담당이 되는 참경에 있는 것이올시다.
조선일보: 1925.01.31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전차 승무원이 되었는데 정작 돈도 많이 못 벌었다니 승객에게 심술궂게 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겨우 살림을 이어갈 정도로 빠듯한 수입인데, 괜한 사고가 생겨서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되면 곤란하다. 수십 명이나 되는 손님들이 들고 나는데 전차에 어지간히 큰 가방을 들고 탄다면, 행여나 다른 손님이 다치기라도 할까 얼른 내려보낼 법하다.
이런 빠듯한 전차 승무원의 사정 덕분에 김첨지는 또 다른 손님을 인사동까지 태워 드리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인사동이라고 하면 한적하게 갤러리나 전통문화를 즐기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1920년대의 경성의 인사동은 오늘과 느낌이 많이 달랐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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