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좋은 날> 서울 문학기행, 일곱번째 이야기
인사동은 당시 경성의 물리적인 중심이었다. 고종은 건양원년(1896)에 태화관이 있던 자리에 이곳이 한양(서울)의 중심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심점 표지돌을 세웠고, 그것이 전국 지번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인사동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몰랐을 거다. 왜냐면 웃기게도 이 표지돌이 건물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빌딩 1층에 있는 이 표지돌 아래에는 “이곳이 인사동 194번지로 예전에는 ‘순화궁’터였는데 그 후 삼일 만세 운동의 현장인 태화관이었고, 현재는 하나로 빌딩으로 변천된 유서 깊은 장소이다.
고려 왕조에 이어 조선조를 창시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별궁으로 이용되었던 서울(한양)을 도읍지로 삼고 1395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서울 도읍의 중앙지점을 이곳으로 잡아 이곳에 지표석을 세웠던 것이다. 그 후 대한제국 때 건국의 번지(지명) 중심지점으로 하여 건양원년(1896)에 이곳이 서울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 표지석을 세웠다”라고 쓰여 있다. 지금 서울의 지도를 펼쳐서 그 지리적 중심지를 찾아보면 남산 어귀가 될 것이다. 한국이 독립한 이후 강남 지역을 개발해서 서울로 포함했기 때문이다. 확장이 거듭되어 거대한 서울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김첨지가 누비던 경성의 중심은 인사동이었다.
그 시절의 인사동은 지리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2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영화관인 우미관이 인사동에 지어졌다. 언제나 2,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들어서 당시에는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고급 영화관으로 유명했던 조선극장도 인사동 한복판에 있었다. 무려(!) 14만 원의 건축비를 들여서 현대식으로 지어졌고, 3층 건물에 불과하지만, 무려 승강기도 설치된 대규모 극장이었다고 한다. “애걔걔, 현대식 고급극장이라며 고작 3층에 14만 원”이라고 코웃음이 나오려나.
하지만 당시 100원이 현재 시가로 천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이 계산법이 조금 부풀려졌다는 평가에 따르더라도, 조선극장을 짓는데 백억 원 이상이 든 셈이다. 이쯤 되면 극장 하나에 백 억이라며 입이 쩍 벌어지겠지. 조선극장이 얼마나 화려한 문화를 상징했는지는 개관식 날의 신문을 봐도 알 수 있다. 1922년 11월 7일에 열린 조선극장 개관식을 위하여 인사동 어귀부터 만국기와 오색기가 걸렸고, 칠백여 명의 내빈이 초대되었다. 오늘날 영화제에 참석한 연예인이 레드카펫 위로 나타나면 조명이 팡팡 터지는 장면이 겹쳐진다.
이번에 새로 건축한 부내 인사동 조선극장은 예정한 바와 같이 어제 육일 오후 한 시부터 동 극장에서 개관식을 거행하였는바 인사동 들어가는 어구로부터 극장까지는 만국기와 오색기며 전등으로 찬란하게 장식하였고 극장 안에는 칠백여 명의 내빈이 상하층에 가득하였더라. 관주 황원균씨의 개관식사와 여러 변사와 극가의 예술과 극장에 대한 말이 있었고 그 후에는 경성 오 권번 기생의 가무와 및 서양 춤이며 현재 일류명창 이동백(李東伯)의 독창과 현대극계의 권위인 만파회(萬波會)의 신극 출연이 있었고 계속하여 활동사진을 영사하여 내빈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동 오후 네 시에 폐회하였는데 내빈에게는 기념품까지 주었는바 극장에 장관스러운 설비와 찬란한 장치는 조선에 처음이라 하겠다더라.
매일신보 20권 355쪽(3면) 1922.11.07
[만들지도 그러다 떠날지도] 매거진 바로가기⊙.⊙
https://brunch.co.kr/magazine/makea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