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문학기행, 열두번째 이야기
생각보다 인연은 쉽게 끊기 어려운 법인가 보다. 계나를 잊지 못한 지명이는 서른 살이 되던 생일에 호주에 있는 계나에게 대뜸 연락해 다시 만나자고 자기는 계속 기다리겠다고 선언한다. “평생을 기다려도 괜찮아. 사랑해, 계나야.” 라는 깜짝 놀랄 만큼 로맨틱한 국제전화에 계나는 자신도 모르게 일단 오케이를 외치고 만다. 지명이=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좋은 사람인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시크한 계나라고 해도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심쿵 메시지를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마침 호주에서의 생활에 여러 잡음이 생기면서 마냥 즐거운 상황만은 아니기도 했으니.
지명이와 계나는그렇게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기 전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먼저 만나 여행을 즐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도네시아는 호주와 생각보다 가깝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반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으니 여행지로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찌질했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좋은 숙소에 묵고 여행비용도 아끼지 않으며 마치 신혼여행 같은 시간을 보낸다.
나름 럭셔리한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계나는 자연스럽게 지명이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계나가 호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이 아현동의 낡은 주택이었고, 시드니에서는 쉐어하우스나 서비스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았으니, 지명이네 집은 그녀가 살았던 곳 중 가장 자산가치가 높고 안정적인 주거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계나는 그곳에서 온전한 평온을 찾지 못한다.
분명 동거이긴 한데 정작 지명이와 같이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기 때문일까. 계나는 남편을 출근시키는 가정주부처럼 지명이가 새벽같이 일터인 방송국으로 떠나면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 물론 이런저런 이력서를 쓰기도 하고, 대학교 동창들을 불러 홈 파티를 하기도 하지만 그 반가움도 잠시.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한국살이의 고단함과 변하지 않는 친구들의 답답함만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지명이가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것이 안쓰러워서일 거로 생각했다. 당연히 지명이는 계나에게 얼마든지 편안하게 지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아파트라는 자산과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위해 지명이가 현재를 희생하며 힘겨운 회사형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며 계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걔 얼굴이 과로와 수면 부족 탓에 검고 거칠거칠했어. 입 주변이랑 턱에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더라. 이불을 덮기 전에 본 배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어. 얘가 아저씨가 됐네, 하고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하고 아프고 그렇더라고. 얘 이렇게 일하다 암 걸리는 거 아닌가 싶고, 내가 이 모습을 10년이고 20년이고 보다가, 그냥 얘는 매일 이렇게 열 몇 시간씩 일하는 애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고...... 막 눈물이 날 것 같았어. (p.155~156)
지명이의 아파트는 쾌적하고 안락하지만 계나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자유와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나에게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주었을 것이다. 지명이야 체제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만족을 넘어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계나의 가치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겐 중요한 것이 다른 이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계나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았다. 사람이란 너무나 복잡한 존재여서 안정된 거주지와 배우자 이외에 또 다른 것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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