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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sueproducer Nov 08. 2024

가만히 타인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프로젝트 크루로 참여하고 있는 <오프 더 레코드> 전시가 한창이다.

<오프 더 레코드>는 리추얼 커뮤니티 플랫폼 밑미(meet me)에서 기획하고 진행하는 기록 전시이다.


밑미에서 운영하는 대부분의 리추얼들이 특정 행동을 한 후, 기록을 남기는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난 4년간 많은 기록들이 쌓였다. 플랫폼 특성상 개인의 기록들은 소규모의 리추얼 내집단 안에서만 볼 수 있도록 셋팅되어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프 더 레코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록자가 괜찮다면 한 번 '밖으로 꺼내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전시다.


그래서 깊어가는 가을의 서촌의 사사사가에 총 114명의 진솔하고 정성어린 기록물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집중해서 기록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몰래 한 컷 찍었다.


첫 주에는 2층에서 전시 안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관람 동선과 기록물 대여 방법을 간단하게 안내드리고, 중간중간 기록물과 명패를 정리하고, 그밖의 현장 제반 컨디션을 쾌적하게 유지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전시 특성상 과한 설명보다는 스스로 조용히 몰입하실 수 있도록 개입을 최소화하는 편이다. 간혹 적극적으로 질문을 주시는 분들에게는 좀 더 자세한 설명과 추천을 드린다.

오후 타임에 있다보니 해가 살짝 기운 지점부터 노을, 야경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나름의 묘미이다. 밝았다가 어두워지고, 소란했다가 차분해지는 공간을 체감하니 4시간 남짓 있는데도 더 오래 머무르는 느낌이 든다.


관람객들이 많지 않은 시간에는 정리를 하면서 나도 틈틈이 다른 분들의 기록물을 살펴본다. 어떤 마음으로 꾹꾹 눌러쓰거나 타이핑을 했을지 상상해보면 슬몃 웃음이 나다가도 대체로 찡해지곤 한다. ’나답게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이렇게나 간절하구나.‘ 싶어져서.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가만히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집중해서 게시물을 넘겨보는 관람객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연말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강력 추천하면서 꽤나 화제가 되었던 이 책은 ‘본인의 결혼식날 사랑하는 형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슬픔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저자가 유명 매거진 <뉴요커>를 그만두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10년을 근무하며 쓴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매일 미술관에 가서 서있다 왔을지 감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의 상황은 여러모로 다르기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예고없이 상실한 상처로 삶의 목적성과 의욕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타인이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들어낸 작품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저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년을 근무하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왔다.

라고 쓰니 미술관 안이 마치 세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니 정정하겠다. 그 안에도 그곳만의 규칙과 사람과 이야기가 있는 세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낸 긴 치유의 시간을 스스로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의 챕터로 걸어나왔다.


내 삶은 여러 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그 말은 현재의 챕터를 언제라도 끝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예술품과 관람객 그리고 동료들 안에서 고요하지만 치열한 시간을 보낸 저자는 텅 빈 것 같았던 내면을 새로운 것들로 채운다. 책을 읽다보면 1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저자가 미술품을 보는 시선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세상을 대하는 태도 등이 미세하게 계속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패트릭 브링리는 미술관 경비원을 그만둔 후, 그동안 느꼈던 것들을 책으로 펴내고, 뉴욕 도보 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중이다.


사사사가 2층 테라스에서 찰나처럼 스쳐가는 무지개를 보았다.


예술을 흡수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러는 대신 예술과 씨름하고, 나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동원해서 그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부딪쳐보면 어떨까?

나누기 위해서는 치유하고 흡수하고 축적하고 소화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불안하거나 외롭거나 갈피를 잘 잡지 못하겠을 때에는 내가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배우고 몰입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편이 좋다.




전시 [오프 더 레코드] / 기간 : 2024.10.26 ~ 11.14

https://www.nicetomeetme.kr/pages/offtherecordstart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발행: 2023.11.2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135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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