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간창골 김약국네 다섯 딸

<김약국의 딸들> 통영 문학기행, 세번째 이야기

by issueproducer

새터, 멘데, 판데. 직관적인 네이밍 센스 덕분에 이런 지명이 오래 기억되기는 하지만, 통영 구도심의 중심은 역시 통제영이다. 통제영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기관이지만, 일본강점기에도 통제영 건물을 중심으로 사대문의 경계가 지어진 것은 <김약국의 딸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제목을 볼 때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생각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러시아 문학의 어려움이라면 이면에 담긴 사상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어떤 때는 알렉세이였다가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였다가 알료사가 되기도 하는 바람에, 자꾸 헷갈려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약국의 딸들>도 쉬운 책은 아니다. 주로 김약국의 딸들이 주요 인물이지만, 이야기는 그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되면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줄줄이 소개된다. 특히 다섯 딸이 모두 ‘용’자 돌림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란이가 둘째인 줄 알았지? 사실 셋째지롱, 용용 죽겠지”라고 약을 올린다. 인터넷에 “김약국의 딸들 가계도”가 돌아다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아직 김약국의 딸들을 읽지 않았다면 꼭 가계도를 참고하면서 읽기를 추천한다.


갸가 갼지 헷갈릴 때마다 수시로 확인하면서 읽으면 좋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모든 가족이 간창골이라는 한 동네 인근에 모두 모여 살기 때문에 사는 지역을 세세하게 기억할 필요는 없다는 점. 어찌나 다행인지.


간창골이란 이름 역시 통영의 역사를 보여준다. 통제영의 관청이 많이 모인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발음이 바뀌어 간창골이 되었다고도 하고 관창(관가의 창고)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셈이다.


간창골이란 이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통영 사대문의 하나인 서문이 있었다. 이 서문은 서문 고개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 있었는데, 서문고개를 기준으로 동쪽의 사대문 안쪽은 간창골이고, 그 서쪽 밖에는 대밭골과 명정골이 있다.


이 대밭골에 첫째 딸 용숙이가 살았다. 열일곱 살 때 일찍 결혼했지만 아들을 하나 낳고는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 김약국의 아내인 한실댁이 셋째 용란이를 도로골(간창골에서 서문을 넘어서도 명정골보다 더 서쪽 마을)에 있는 시댁으로 데려다 주다가 첫째 용숙이가 손자 동훈이 아파서 치료하러 온 의사 선생님과 썸씽이 있는 거 같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 길로 바로 대밭골에 사는 용숙이네에 들르게 되는데, 이게 다 이 서문 바로 밖 대밭골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둘째 딸인 용빈이는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결혼은 미뤄두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벌과 결혼시기는 대체로 반비례하는 걸까. 그래서 첫째에 이어 결혼을 한 것은 셋째 용란이었다. 의사 선생님과 첫째딸 용숙이의 썸을 엄마인 한실댁에게 고해바친 것은 서문 밖이었지만, 사실 용란이네 부부가 살던 신혼집은 통영 사대문의 정반대 편인 동문 밖이다. 동문 밖으로 나오면 다시 통영 앞바다를 만날 수 있는데 이 바닷가 지역 이름이 멘데다. 용란이와 결혼한 연학이는 좋은 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 아편쟁이였고, 그의 부모도 이런 연학이에 대해서는 진절머리가 나서 자신들의 집이 있는 통영 서쪽 끝 도로골에서 통영 구시가지 동쪽 끝인 멘데로 신혼집을 차려줬던 것이다.


멘데 막바지, 부잣집 맏아들을 세간 낸 집이라고 초가집 틈새기에 끼어 있는 네 간 기와집의 기둥은 제법 큼지막하였다. 연학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큰댁이 있는 도로골과 이 멘데 막바지는 통영읍에 있어서 거의 끝과 끝으로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연학이의 부모들이 얼마나 진저리가 났으면 아들 내외를 그렇게 먼 곳으로 쫓았는지 능히 짐작되는 일이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약쟁이 아들을 엄청나게 멀어서 서로 만나러 가기가 굉장히 어려운 곳으로 내쫓았구나 싶다. 근데 멘데로 신혼집을 차린 이후로도 용란이는 자주 김약국네에 드나든다. 얘 혼자 날마다 마라톤 뛰는 건가 용란이 무릎 건강이 걱정스럽다.


사실 용란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것은 무릎 건강보다는 남자 걱정이다. 연학이와 결혼을 하긴 했지만, 옛 연인 한돌이를 잊지 못한 용란이는 결국 연학이가 유치장에 들어간 틈을 참지 못하고 두 집 살림을 차리고야 만다. 용란이의 두 번째 신혼집은 북문 밖이라고 한다. 용란이의 엄마인 한실댁은 그 집을 찾아가는 길에 북문 밖 좁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힘겹게 한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통영 사대문의 북쪽 오르막길은 어차피 그 길이가 그리 길지 않다. 크게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그토록 힘들어 했던 것을 보면 진짜 몸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딸의 외도를 확인하러 가는 마음이 고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아차, 그 시대 저 동네의 거리감각이란 이런 거구나”하고 머쓱하다. 김약국네 집에서 용란이네집은 아무리 멀어봤자 2km 내외니까 걸어가도 30분 정도면 닿는 거리인 셈이다. 게다가 용란이가 바람을 피우면서 한돌이와 함께 지낸 두 번째 집 역시 기껏해야 2km 거리였다. 연학이든 친정 엄마인 한실댁이든 마음만 먹으면 30분 내로 달려올 수 있는 위치로 도망가서 새집 살림을 차렸다는 것을 보면 배포가 작은 것인지 아니면 간이 큰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집간 넷째 딸 용옥이는 신혼살림을 시댁에서 시작하게 된다. 원래 친정이 있던 간창골에서 서문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향하면 바로 나타나는 명정골에서 살았던 것이다. 원래 소학교 공부를 마친 후 집안일을 살뜰히 살피던 용옥이는 시집을 가서도 시댁과 친정 두 집 살림을 모두 살피느라 서문고개를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래도 목이 말라서 힘든 일은 없었겠다. 명정골에 들어서면 정당새미(정당샘)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정골이라는 이름 역시 맑은 샘이 있다는 데서 왔다. 오늘 통영을 찾아가도 이 우물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용란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백석의 시비가 보인다.


이 거대한 돌 기둥이 백석의 시가 적힌 비석


아니, 학교 교과서에서 백석은 “이북 사투리의 토속성”이 있다고 했었는데 왜 통영 명정골에 백석의 시비가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어지간한 작가에 대한 특징을 배웠던 것은 오래전에 다 잊어버렸지만, 백석 시인만큼은 엄청나게 잘생긴데다 자야 여사와의 러브 스토리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는데 말이지.


사실 자야 여사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백석 시인이 첫눈에 반해 애정 공세를 쏟았던 진짜 첫사랑은 따로 있었다. 1936년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다른 친구로부터 한 여자 ‘란’을 소개받는다. 통영출신의 이화여고 학생이었던 란 역시 백석에게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 싶다. 당시의 백석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 여자분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 설레니까.


결국 백석은 통영까지 내려가 교제를 허락받으려 했지만, 백석의 잘생김도 란의 부모님께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충렬사 계단에 앉아 교제 허락을 받지 못한 아쉬움을 담은 시만 남겼다.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은銀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통영2 / 백석 1936년 1월 23일 발표)


란은 백석의 절친한 친구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게 뭔 막장 스토리인가 싶지만, 그래도 백석은 또 다른 사랑 자야 여사를 만났고 우리에게는 명정골의 아름다움이 담긴 시가 남았다.


두 개의 샘과 빨래터. 정말 이곳에서 백석 시인이 좋아했던 란이라는 소녀가 물을 긷고 빨래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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