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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Nov 12. 2019

터키에서 가장 신성한 산, 넴루트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이 잠든 곳


 Nemrut Dag
인간이 신을 만나는 곳
동서양의 신이 공존하는 땅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왠지 나는 이번 여행이 험난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되는 블로그 몇 개만 찾아봐도 아나톨리아의 지형은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여행정보를 얻기 위한 검색을 하지 말자 마음을 먹었었다. 괜히 이것저것 문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다가 덜컥 겁을 먹으면 식구들에게 가지 말자고 할 수도 있었다. 늘 아이와 함께 해야 했기에 안락하고 편한 여행을 고수하던 나에게 넴루트 산은 충분히 모험이 될만한 곳이었다. 비행기 타기 전날까지 나는 아무 생각도 않고 여행용 케리어에 간단한 짐만 챙겼다. 렌터카와 호텔은 남편이 예약을 했을 테니 일단 도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있었다. 넴루트에가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나는 막무가내로 그곳을 향했다.


1박 2일로 계획한 짧은 여행이었다. 토요일 새벽에 이스탄불 사비하 공항을 출발해서 1시간 30분 만에 말라티아 공항에 도착했다. 터키의 다른 관광지와 다르게 말라티아 공항은 한적했다. 평소처럼 공항 렌터카 회사로 곧장 갔다. 렌터카 회사에는 차도 몇 대 없었다. 렌터카 종류도 안탈리아나 카파도키아처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렌터카 직원은 반갑게도 우리에게 한국차 엘란트라를 주었다. 한국에서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쯤 부모님이 타셨던 차였다. 엘라트라는 잔 고장 없이 튼튼한 차로 유명했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단종되어 볼 수 없는 차였다. 중고차로 해외 시장에 팔린 건가?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아마 해외에서는 아직 판매하고 있을 것이란다. 아무튼 나는 이 고물차가 무척 반가웠다. 터키 살이를 시작하고 나서는 내 나라에 대한 회귀본능인지 삼성이나 현대 같은 우리나라 회사 마크만 봐도 좋았다.


반가운 엘란트라를 타고 우리는 공항을 떠나 넴루트 산으로 달렸다. 구글맵에 찍히는 예상 시간은 2시간 30분. 생각보다 꽤 오래 걸렸다. 사비아 공항에서 오전 7시 비행기를 타서 말라티아에 8시 30분에 도착했다. 이대로라면 11시쯤 되야 넴루트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둘러 길을 떠난 지 20분 만에 우리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공항에서 넴루트 산까지 125km가 나오는데 예상시간이 2시간 30분으로 나올 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강원도 미시령이나 한계령 같이 꼬불꼬불한 산길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2시간 넘게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을 생각을 하니 등줄기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주위는 온통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산 하나를 넘어서 내려가면 또 다시 넘을 산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첩첩으로 둘러싸인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이  넴루트 산일 것 같았다.


나는 여행 전 미리 넴루트 가는 길에 대해 검색하지 않을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절대 오지 안 했을 거야! 안전하지 않은 곳, 안정적이지 않은 선택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나였다. 몰랐으니 겁없이 올 수 있었다. 눈 앞에 닥쳤으니 어쩔 수 없이 길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달리는 차 속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코 앞은 가드레일 하나 없는 낭떠러지였다. 타국에서 이런 길을 운전해서 가는 남편이 대견했지만 아들이 겁을 먹을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었다. 바짝 긴장해서일까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상쾌해서 차창을 더 내렸다. 유난히 맑고 신선한 공기였다. 한때 전 세계를 평정한 투르크인들이 받았던 아나톨리아의 정기를 받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천 길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수 차례 산을 오르내렸으니 정신이 아득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몸 속에 세포가 하나씩 반응하며 내 몸의 다른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롤러코스터를 몇 시간쯤 탔을까? 저 멀리 넴루트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꼭대기에 돌무더기와 거대 석상의 우뚝 쏟은 모습을 보니 우와, 저기로구나! 고지가 저 앞에 있구나 싶었다. 넴루트 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주차된 차는 하나도 없었고 매표소와 관광객을 위한 테라스도 문이 닫힌 상태였다. 11월 초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더니, 벌써 관광객의 발길은 끊기고 매표소와 관광업소도 폐장한 상황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올라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올라가는 길은 막아 놓지 않아 우리는 계속 올라가 보기로 했다.


정상이 가까워졌다고 안도할 틈도 없이 고지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점점 더 형편없어졌다. 포장도로는 이미 끝났고 비포장 도로에 가파른 경사까지 여기를 차로 가다간 차가 오히려 짐짝처럼 느껴질 것 같아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나아 보였다. 구글 맵에서 거리를 측정해 보니 2.5km 이상 산을 올라야 했다. 해발 2000미터, 이미 기온은 영하로 변해 있었다. 10살 아이와 걸어서 올라가는 건 무리였다. 결국 우리는 비포장 비탈길을 다시 차로 가기로 결정했다. 잡석을 깔아 놓은 울퉁불퉁한 길에서 자동차 바퀴가 밀리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얼마나 가파르고 길이 좁은지 여행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데...... 하는 늦은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었다. 차는 이미 출발했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앞으로만 갈 수 있었다. 힘 좋기로 소문난 한국차 엘라트라가 잘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4륜 구동도 아닌 승용차로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별별 생각을 다하며 우리는 더 이상은 차로 들어갈 수 없는 구역까지 다 달았다.



여기서부터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먼발치에 넴루트산의 거대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아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반겨줬다.  패딩점퍼에 모자,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고 해발 2,134m인 넴루트 산 꼭대기로 한 발짝씩 다가갔다. 그리고 몇 발짝을 더 걸어 산 아래로 눈을 돌렸다. 이런 장관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선계와 하계를 나누는 듯,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린 천정벽화에서나 보던 구름들이 내 발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 아래로 수십 개의 아나톨리아 산봉우리와 에메랄드 빛 강줄기가 펼쳐졌다. 넴루트 산 정상에 올라와보니, 이 곳은 정말 신들이 사는 곳이 맞았다. 그 옛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고귀하고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을만 했다. 세상을 발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여기는 특별한 존재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라 느꼈을 것이다. 2000년 전, 기원전 1세기에 이 곳에 묻혔다는 콤마네게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는 여기가 자신이 죽어서도 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넴루트 다으(Nemrut Dag)는 터키 아디야만 주 아티트로스 산맥에 있는 콤마네게 왕국의 유적이다. 기원전 1세기경 아나톨리아 남동부, 콤마네게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의 돌무지 무덤으로 산 정상에는 북, 동, 서 방향으로 테라스가 있고 북쪽과 동쪽에는 9m 높이의 거대 석상들이 있다. 석상은 모두 7개인데 신이 되고 싶었던 왕, 안티오코스 1세 자신과 아폴론-미트라, 티케(콤마네게의 다산의 여신), 제우스-오로마데스, 헤라클레스-아르타크네스 같은 동서양의 신들, 그리고 이들을 수호하는 독수리, 사자상이 있다. 원래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200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한 석상의 머리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시라아 북부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왕국이었던 콤마네게의 왕국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교역을 했던 나라였다. 석상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신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는 동서양 문화가 혼재된 이중적인 터키 문화의 기원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잘 말해준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만큼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유적지가 있다면 아마도 여기, 넴루트 다으(Nemrut Dag)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넴루트산 경비아저씨가 보고 가라고 알려준 비석.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알파벳과 닮은 선명한 고대 그리스 문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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