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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16. 2021

평범하고 위대한 인생

이스탄불에서 마흔



동생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외할머니의 내추럴한 포즈의 사진 한장^^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외할머니는 집에서 다리를 저렇게 벽에 올려놓고 계실 때가 편하신가 보다. 요즘 외할머니 인생의 최대의 과제는 '다리를 움직이는 일'이다. 무릎에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으셨는데, 걷기는 한 결 편해지셨다는데,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바닥에 앉아야 할 때는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아 힘들어하신다. 나이 먹으니 움직이는 게 일이다 하시는 걸 보면, 우리 할머니 이제 많이 늙으셨다. 남은 여생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은 나의 외할머니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매일같이 미용실을 하는 큰 외숙모 댁으로 출근하신다.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외할머니 인생의 괴적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은 그저 습관이다. 아침식사를 하면 집에서 20분 거리의 미용실까지 운동삼아 가서 파머용 수건도 빨아주고, 머리카락 청소도 도와주신다. 큰 외숙모는 20년 넘게 사는 동네에서 미용실을 운영해왔다. 그 동네 어르신들, 아주머니, 아이들이 단골손님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동네 사랑방처럼, 꼭 머리를 하지 않더라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르는 그런 동네 미용실이다. 이렇다 보니, 외할머니는 별일 없으면 마실 나가듯 큰 외숙모 미용실에 나가서 일도 도와주고 사람들이랑 어울려 식사도 하고 때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매일 만난다고 하면 기겁을 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한 두 분은 이미 친정엄마인지 시어머니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으로 우리 가족은 알고 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외할머니는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셨지만 원래, 원더우먼, 슈퍼맨, 아니 그 이상, 아무튼 어벤저스급 체력을 자랑하는 어머어머 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지병을 앓았던 외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셨고, 딸 둘 아들 넷, 그러니까 6남매를 먹이고 기르셨다. 일찍부터 주택 청약 제도가 현명한 내 집 마련 수단임을 알아보고, 청약저축에 가입해서 아들들 장가갈 때는 신도시에 아파트 한 채씩을 장만해주시기도 했다. 그 덕에 자식들은 보통 한국인의 최대 고민인 내 집 마련 걱정을 덜고 살았다.


이 뿐인가? IMF 이후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엄마는 내 대학 등록금 걱정에 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외할머니는 모아둔 돈뭉치를 싸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나의 첫 대학 등록금은 본인이 마련해 주고 싶어 모아 온 돈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10년 정도는, 매달 얼마쯤 나를 위해 모아 오셨을 것이다. 엄마는 눈물을 터트리며 고마워했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내 등록금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학생이 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미래에 대한 준비성이 철저하신지 경의로울 지경이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온 가족을 살뜰히 챙겨 온 할머니가 더 대단해 보인다.


할머니는 시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모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일 년에 집안 제사가 14번이 있었으니까. 음... 코로나 때문에 삼시 세 끼를 꼬박 집에서 한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지금의 내가 사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할머니의 지난 삶을 어림짐작할 수조차 없다. 시부모 모시고 살면서, 자식들 키우면서, 살림을 쪼개고 쪼개서 저축하며,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서 먼 미래를 준비하며 사셨다. 자식 누구 하나 힘들까, 인생에서 갑작스러운 어려움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하루를 차곡차곡, 참 알뜰한 인생을 사셨다.


30년도 전 일이다. 할머니가 50대였던 시절, 내 나이 일곱여덟 살쯤이다. 어린 시절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외가에 갔을 때를 돌이켜봤다. 할머니는 항상 내게 인사처럼 "아가, 밥 묵었나?" 하며 끼니를 챙기셨다.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할머니의 정감 어린 밥타령. 생각해보면 이 밥타령이 내가 일상에서 목격한 할머니의 삶 그 자체였다. 자식 여섯에 손자, 손녀들까지 집에 들락거리고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사셨던 외할머니의 삶에서, 그 당시 최대의 과제는 '식구들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가진 뜻 그대로,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혹시 배고프지 않을까 밥을 먹었는지 묻는 일은 할머니 삶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식구마다 '밥 먹었냐" 묻는 것은 외할머니의 인사이자 사랑법이었다.


하루 세끼, 보통 10인분 이상. 식구들이 먹을 밥을 하랴, 끼니 챙기랴, 종갓집 살림살이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할머니는 그 고된 일상을 어떻게 사셨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할머니만의 꿀팁이 있었다.  바로 '쪽잠 자기'이다.  평소 할머니는 저녁밥을 다 해 놓고, 식구들이 오기를 기다리셨다. 10분이나 15분, 식구들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할머니가 쉴 수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때, 할머니는 얼른 아무 베개나 집히는 데로 베고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셨다. 거의 머리가 배게에 닿자마자, 할머니는 바로 코를 골며 잠에 빠지셨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빨리 잠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식구들은 할머니는 땅 냄새만 맡으면 바로 잠든다며 놀렸었다. 이렇게 주무시다가도 누군가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 "밥 묵었나" 하며, 다시 밥타령.


외식을 할 수 없게된 요즘, 삼시세끼 밥상차리기가 힘든 나를 탐구하다 보니 평생 밥 챙기기에 열정적이셨던 외할머니가 잠꾸 생각나는거 같다. 언제, 어디서든지 잠들 수 있는 고된 몸을 가지고도 매일 대식구 밥을 해내던 할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가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가족을 곧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분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딸려 나온 자식, 손자 손녀들이 온통 자신과 하나라고 느끼셨을 것이다. 그 힘으로 늘 할머니는 할 일을 거뜬하게 해 내셨다. 어릴적 머리만 땅에 닿으면 잠드시는 외할머니 모습이 신기했었는데 이제 와서 그때를 떠올려보니, 매일같이 꽉 찬 일과의 반복을 이겨내기 위한 할머니만의 꿀팁이었다.

할머니는 일과 삶을 나와 식구를 하나로 생각했기에 일하는 데로 하고, 쉴 수 있는 데로 쉬며, 살뜰히 그 많은 식구들을 다 건사할 수 있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한 평생 살아온 우리 외할머니의 평범한 인생, 이것이 위대한 인생이 아닐까? 할머니 사진을 올린 내 동생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나와 사촌동생이 남긴 깨알 같은 댓글을 보며 가족들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진다. 내 동생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된 맛있는 음식과 멋진 장소에서 찍은 화려한 사진들과 대비되는 투박한 할머니의 사진 한 장. 세련되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기 바쁜 우리가 정작 감동하고,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밥 챙기기 바쁜 일상이 몸에 밴 우리 할머니라니.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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