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와 소비자의 생존 전략
새벽 출근, 야근, 주말 출근까지,
공무원도 워킹맘이 쉬운 건 아니었다.
미니멀 라이프의 시작은 5년 전이었다. 5살이던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을 했던 워킹맘 시절. 어떻게든 낑낑대더라도 잘해보고 싶었지만 삶이 팍팍했다. 나란 존재는 없고 내가 해줘야 할 일들만 수두룩한 역할 과잉에 숨만 겨우 쉬고 살았다고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내 숨통이 튀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평일에는 육아나 살림을 전혀 도와줄 수 없는 남편에게 토요일 하루만큼은 내 시간을 같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평일 독박 육아의 대가로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을 허락받았다. 내가 없는 토요일 이 시간만큼은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하게 된 글쓰기는 내 일상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기회가 됐다. 그러면서 가장 생활에 기본이 되는 정리정돈에 관심이 갖기 시작했고 문득 집 안에 물건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거나 중복되는 물건을 정리해서 나눔 하거나 버렸다. 새 물건을 살 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정비하고 신중하게 결정하기로 했다.
생활에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두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집안에 여러 가지 집기부터 냉장고 속까지 말이다. 꽉꽉 채우던 냉장고는 정확히 필요한 양만 장을 보고 60% 이상 채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처녀총각 때 입던 안 입는 옷가지들, 아이의 발육에 맞지 않는 장난감, 잘 쓰지 않는 가구나 가전 등을 대거 정리했었다. 큰 마대자루로 10개 이상을 비우고 나니 빼곡하게 들어찼던 집안에 빈 공간이 생겼다. 이렇게 빈 공간은 대장에 묵은 숙변을 빼낸 것 같은 상쾌함을 선물했다. 꼭 필요한 물건만 두고 집이 정돈되자 초보 살림꾼으로 집안일엔 영 취미가 없던 나도 조금씩 정리하는 재미가 붙었다. 집안에 필요한 것이 제 자리에 있고 공간이 생기니 자꾸 무엇인가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또 물건들 틈 사이에서 물건을 관리하는 수고도 덜어 주었다. 예를 들어 냉장고를 너무 채워 놓으면 상태 파악이 어려워서 일부 식품이나 해 논 음식을 썩혀 버리기 쉽다.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 음식물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아 혹여 상하면 그 상황 자체가 불쾌감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맞벌이 부부에겐 흔한 일이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먼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남은 야채를 몽땅 넣고 볶음밥을 해 먹고 정갈하게 비어 있는 냉장고를 두고 사는 생활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언젠가부터 생활의 군더더기를 그때그때 정돈하지 못하면 불쾌한 감정을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휴직을 하고 주거지를 이스탄불로 옴 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필요한 물건만 선별해서 가져오려고 했고 집안에 불필요한 것들이 늘어나지 않게 주의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미국엔 블랙프라이데이, 영국엔 박싱 데이처럼 이스탄불도 연말부터 시작하는 메가 세일이 두 달 정도 이어졌다. 터키 브랜드는 물론 글로벌 SPA 브랜드까지 50%부터 70%까지 대대적인 세일을 감행했다. 한국은 세일 상품을 파는 아웃렛이 따로 있지만 터키의 쇼핑몰은 그 시즌 안에 상품의 할인율을 높여 최대한 싸게라도 팔아 치우는 전략을 쓰는 것 같았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해 온 나지만 터키의 첫 대대적인 세일을 목격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자라에서 우리 돈 3만 원에 아들의 겨울용 털 점퍼를 구입할 수 있었다. 마시모 듀띠 같은 상위 스파 브랜드도 3만 원이면 겨울용 니트 구입이 가능했다. 너무 싸니 안 사면 손해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번뜩였다. 한국과 다른 쇼핑 환경에 놓이자 나는 미니멀 라이프보다 합리적 소비에 더 구미가 당겼다. 자라홈, 오이쇼 등 인디텍스 그룹 계열의 SPA 브랜드가 50% 세일에 돌입하자 마치 세일을 기다린 사람처럼 쌈짓돈을 풀어가며 쇼핑을 했다. 통관이 어려워 해외 배송 자체가 어려운 터키에선 오프 라인 쇼핑이 답이라며 곰실곰실 물건을 사들였다.
며칠간 폭풍쇼핑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것저것 너무 많이 샀다. 이제 브레이크를 걸고 다시 중심을 잡을 시간이었다. 산 옷가지와 물건, 기존에 있던 것들을 비교해서 정리하고 나눠 줄 것들도 분류했다. 세일 폭은 점점 더 커져서 70% 인디림[ INDIRIM: 할인]까지 내려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집 근처 쇼핑몰엔 마트, 세탁소, 은행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있었다. 인디림 퍼레이드 속에서 매일 쇼핑몰에 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속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외치며 세일 일색인 온갖 매장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어쩌다 오이쇼 매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쇼윈도에 마네킹이 죄다 옷을 '훌러덩' 벗겨져 있었다.
반값 세일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디스플레이된 상품까지 몽땅 털어간 것일까? 그럴 리가.
판매율이 98%라는 인디텍스 그룹의 마케팅에 감탄했던 순간이었다. 마케팅과 판매전략에 미니멀리즘이 녹아 있다니! 자라를 대표로 하는 스페인의 글로벌 패션그룹에선 RFID나 QR코드를 이용한 온-오프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여 패션과 최첨단 기술을 접목하고 있다. 과잉생산 없이 적정량만 생산하는 방식으로 재고율은 낮추며 판매율을 높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똑똑하구나! 이미 자라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Amancio Ortega)는 2018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자 10위 안에 진입했다. 스마트한 전략으로 전 세계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인디텍스 그룹의 독주가 4차 혁명시대가 가지고 올 승자독식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핵심동력인 기업에서 조차 이제는 잉여 생산물을 경계하는 전략을 쓰다니. 미니멀 라이프가 일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에 트렌드가 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넘치는 상품에 지쳐 있다. 이제 사람들은 과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질 구리 하게 늘어놓고 사는 것은 오히려 물질 과잉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정신적 궁핍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과 앱으로 무장한 포노 사피엔스는 생산자만큼 똑똑한 소비자다. 프로 컨슈머를 넘어 스스로 소비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있다. 광고를 이미지라고 생각할 줄 알고, 티끌같이 쓴 카드값이 모여 태산 같은 무게로 자신의 삶을 억누를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사람들은 나를 기준으로 최적화된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 스타일을 스스로 만들려고 애쓴다. 편리하고 다종 다양한 데이터로 무장한 개념 있는 소비자. 가성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나눔 같은 생산과 소비에 대한 사회적 윤리까지 고려하는 소비자. 전문가급 정보를 보유한 소비자는 ‘얼마만큼 상품을 소유할 것인가?’ 합리적인 저울질을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팽팽한 밀당 사이에서 앞서가는 기업은 벌써 생산과 판매 전력에 미니멀리즘을 녹여 넣었다. 나에게 맞는 개념 있는 소비를 추구하고 미니멀 라이프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과 기업의 생존 전략은 서로 연동되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