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는 글쓰기
몇 달 동안 브런치 연재를 못하고 있었는데 내 글을 기다리던 가족과 지인들이 왜 글을 안 쓰고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현지 적응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언어 공부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둥, 여름 방학 동안 아들과 함께 하느라 글쓰기만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는 둥, 핑계만 늘어갔다.
어느 날은 남편이 브런치에 연재 안 할 거냐며 물었다.
영어공부에 터키어까지 소화하랴 방학 동안 찰떡같이 붙어있는 아들 스케줄을 쫓아다니랴, 사실 글 쓸 여력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는데, 남편은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짬이 나면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낄낄거리던 내 모습을 아는 남편이 내 말에 동조 할리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그저 핑계일 뿐이다.
아이의 여름 방학이 끝났고 나는 이스탄불에서 4계절을 모두 겪으며 완전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글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 상태가 될 때쯤, 나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이 맞을까? 좋아하는데 이렇게 안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재미있고 좋아하는 건 밥도 안 먹고 낑낑대더라도 기여코 하지 않을까?
욕망은, 의식과 결합된 욕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할 때, 그것에 대한 의지(意志)가 있을 때, 또는 그것을 열망하거나 욕망할 때, 이는 우리가 그것이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3부 정리 9의 주석 중에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좋아서가 아니었다. '즐겁다'라고 하기보다 내가 버겁다고 느끼는 어떤 행위를 해내고 있다는 나의 의지가 좋았다. 이스탄불에 오면서 백수가 된 나에게, 나는 남들에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비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휴직을 하고 직업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자 나는 뭐하는 사람이지? 나는 나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다. 엄마나 아내라는 이름 외에 나는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 브런치에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공개적으로 쓰지 않으면 이 힘든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의존적인 태도라는 것을 알지만 심리적 강제를 만들어야 글쓰기를 지속할 것이라는 나의 계산은 일종의 전략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하고 싶은 것이라기보다 해야만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쓸 수밖에 없는 환경 설정까지 하면서 써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전에는 계산할 수조차 없는, 전혀 다른 지점에 노인 경험을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어떤 결론에 이를지, 그러니까 내가 다른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나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글을 모두 마쳤을 때만 다다를 수 있다. 마치 콜럼버스가 항로를 잘못 계산했지만 항해를 떠났고 어딘가에 이르렀기에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일단 쓰기만 하면 결국 나는 새로운 나의 지점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기보다 나에 대한 새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유익함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쓰고자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브런치는 내에게 글을 쓰게 하는 심리적 강제를 일으키는 도구인데 나는 브런치를 이용해서 글을 쓰는 루틴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자꾸 도망치곤 한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나의 생활에 맞는 글쓰기 루틴을 만드는 일이다. 반성문 같아 웃프지만 현재에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지 않는 글쓰기라도 글 쓰는 나를 욕망하는 한, 나는 계속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