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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r 11. 2018

이곳은 분명 숨은 보석일 거야

<나의 작은 헌책방> 속 그곳, 오카야마 구라시키 무시분코


봄날의

배경여행




이어 플러그가 귓속에서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관광객들과 호객하는 상인들의 활기로 북적이던 거리에서 살짝 비켜간 골목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헌책방 무시분코 蟲文庫 가 보였다. 나는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걷고 있었다. 



우린 오후 느지막이 구라시키에 도착했다. 여섯 시면 해가 떨어지는 이곳에서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는 우울함을 극복하지 못한 남편이 뭉그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호텔방에 홀로 남겨두고 구라시키 미관지구에 들어갔다. 나 역시 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에 몹시 울적했지만 눈부시게 맑은 날의, ‘미관’이란 단어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면 그땐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질 것 같았다. 



벌써 떨어지다니.
오카야마 구라시키 미관지구
구라시키 아이비 스퀘어


서둘러 맞은 봄 햇살은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바람은 여전히 싸늘하다. 물론 그 바람은 하얀 건물이 놓인 이곳 미관지구에 먼지 한 톨 내려앉지 못하게 하는 듯 더욱 깨끗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1979년에 미관지구로 지정된 이곳은 21헥타르 규모의 면적에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와 전통 미관 보존지구가 함께 있다.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의 직할지가 되고 대관소가 설치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라시키 강을 통해 물자가 활발히 오가고, 강변을 따라 흰 벽의 창고와 집들이 들어섰다. 그 후 현재까지 자연재해나 전쟁의 피해가 없어 건물과 경관이 오래도록 보존되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오카야마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여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한 듯 기모노를 (아마도 대여해) 입은 젊은 일본인 커플도 많았고 외국인 관광객도 상당했다. 또 일본의 유명 관광지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력거꾼과 관광용 배의 노를 젓는 사람들까지. 전형적인 관광지의 시끌시끌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혼자 있어 감상을 나눌 사람도 없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이곳을 서둘러 빠져나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굳이 구라시키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 한국어로 번역을 해보고 싶단 생각을 한 수필집이 한 권 있다. <나의 작은 헌책방 わたしの小さな古本屋>은 오카야마 구라시키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헌책방 ‘무시분코’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20년 넘게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다나카 미호 씨. 책에는 책방을 운영해 나가는 이야기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게다가 드문드문 등장하는 고양이와 강아지 등 동물들의 이야기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책장을 덮으며 ‘이곳은 분명 구라시키의 숨은 보석’ 일 거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 헌책방을 해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때까지 2년 정도 일했던 아르바이트를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헌책방에 갔습니다. 그리곤 친한 책방 주인에게 마음을 정하기도 앞서 말부터 내뱉어 버린 것입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취직을 했습니다만, 그 회사란 곳이 노동기준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곳이라 근무한 지 10개월 만에 몸이 망가져 퇴직. 당분간 풀타임 근무는 어려워 찻집이나 선물가게 등에서 단시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요령이 좋지 못해, 계산이 서투르고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낮은 편. 이미 ‘회사엔 적성이 맞지 않다’는 자각이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내 가게를 차리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가게 주인이 되고 싶단 생각이 아니라 단지, 내가 있을 곳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헌책방 주인이 되자’고 결심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자금이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책이라면 이미 주변에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진열해 볼까, 라는 안이한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헌책방에서 일을 배우는 기간은 물론, 지식도 마음가짐도, 자존심도 야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 <나의 작은 헌책방>의 시작 


 

무시분코에는 체감상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에 해당하는 책이 많아 보였다. 일본 소설, 수필을 좋아하는 나는 선뜻 손이 가는 책이 많지 않았지만, 일을 하면서(백과사전을 만들 때) 참고로 한, 익숙한 사전들이 많이 보여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나의 작은 헌책방>의 저자이자 이곳 책방 주인인 다나카 미호 씨는 이끼 애호가. 이끼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오카야마 이끼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고, <이끼와 걷다>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관심이 가는 책이 하나 보여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가 다시 돌아와 집어 들었다. 그러던 중 한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치바에서 왔다고 하는 아주머니는 책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끼 연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아주머니는 깨끗한 이끼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단다. 그러던 중 이끼 관련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다나카 미호 씨와 무시분코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언젠가 오카야마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버려 책을 고르던 손이 멈춰버렸다. 실제로 다나카 씨가 앉아있는 자리 뒤로 이끼가 살고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건물 뒤쪽에 산이 솟아 있어 이끼가 살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라고.  





역시 아까 봐 둔 책 보다 사고 싶은 책은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다구치 쿠미코의 <서점 번성기>란 책을 샀다. 다나카 씨의 양해를 구한 후 책방 내부를 사진에 담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봄빛을 뿜어내던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남편을 데리고 나와야지.  


 

“여기다 여기.” 

청년 둘이 호들갑을 떨며 책방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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