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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Apr 09. 2018

외갓집이 배경이라면  담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배경, 경북 의성과 군위


원작 만화와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에 리메이크되었단 소식을 듣고도 선뜻 영화를 보러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이 ‘주말에는 좀 멀리 가볼까’하여 의성까지 가는 길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보았다. 확실히 원작과는 강조하는 포인트가 빗겨 나 있다. 한국영화엔 친구들과의 우정과 미묘한 삼각관계, 서울살이의 고달픔, 엄마와의 관계 등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부각되어 있었다. 내가 <리틀 포레스트>란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계절에 대한 묘사, 각 계절마다 얻을 수 있는 식재료, 그때 먹어야 맛있는 제철요리, 그리고 그 시기마다 반드시 해두어야 하는 농촌의 일. 이런 것들로 이뤄진 시골의 일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원작 만화를 그린 작가가 실제로 일본 도호쿠에 있는 농촌 마을에 살며 엮은 이야기라 매우 현실감이 있다. 한국 영화에선 그 이야기들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주인공 이치코는 잼 용 나무 주걱에 곰팡이가 생긴 모습을 보고 푹푹 찌는 날씨에도 스토브를 켜기 위해 장작을 팬다. 집안 공기를 건조시켜주는 스토브를 켜는 김에 빵을 굽고. 한국판 영화에서도 마당에서 장작을 패지만, 왜 장작을 패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작을 패느라 땀이 나니 술이 당기고, 친구들과 마시는 술맛은 좋다란 이야기가 곁들여질 뿐.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그린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이치코는 도쿄에서 살다가 도호쿠 지방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논과 밭을 일궈서 식재료를 얻고, 맛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나뉘어 있고 두 편씩 묶어 개봉했다. 촬영지도 도호쿠에 있는 오모리란 마을. 한편 올해 개봉한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엔 서울에서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지친 혜원(김태리 분)이 주인공으로, 회사에 다니다가 월급날이나 기다리며 살기 싫다며 퇴사를 하고 돌아온 재하(류준열 분), 고향에서 은행을 다니지만 서울에 가고 싶은 은숙(진기주 분)이 등장한다. 한 편 안에서 겨울부터 시작된 계절이 흘러간다.  


<리틀 포레스트> 세 명의 등장인물 (출처 : 다음 영화)


   

우리 외갓집이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면 담고 싶은   

나에게 <리틀 포레스트>가 각별한 이유는 나도 어린 시절 잠깐의 시간을 보냈고, 우리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외갓집이 자연스레 겹쳐지기 때문이다. 외갓집은 시골이지만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 살았던 친정과 매우 가까워 우리 집 식탁에 산뜻한 영향을 끼쳐왔다. 요즘에도 엄마는 봄이 오면 외갓집에 가서 쑥을 캐와서 찹쌀가루와 설탕을 넣어 만든 쑥버무리를 해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 시장이나 마트에서 산 쑥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 향긋함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몇 해 전 “에이 이미 쑥은 억세서 못 먹어. 지난주에 왔어야지.”라고 말하는 외삼촌의 모습을 보며, ‘쑥버무리가 맛있는 시기도 벚꽃만큼 짧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들빼기김치. 고들빼기는 꽃을 피우기 전에 뜯어서 김치로 만든다. 나는 고들빼기와 민들레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통통한 뿌리를 씹을 때 느껴지는 씁쓸한 맛을 좋아해 시도 때도 없이 엄마에게 “고들빼기김치가 있는지” 묻곤 한다. 엄마는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줄 아니. 쓴 맛을 빼려면 오래 기다려야 돼.”라고 하면서도 때가 되면 해주시곤 한다. 고들빼기김치만 있으면, 아무리 맛없게 끓인 라면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아. 라면은 원래 맛있나. 아무튼. 고들빼기김치와 라면은 환상의 조합이다. 고들빼기는 가을에도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데, 가을이 오면 시골 밥상은 더욱 풍성해진다. 일본 영화에선 이치코가 버려지는 산수유 열매로 잼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이치코는 설탕을 더 넣어야 할까 망설이는데,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잼도 매우 떫었다. 엄마의 잼은 보리수로 만든 것. 산수유와 보리수 열매는 굉장히 닮아 있지만 산수유가 조금 더 신 맛이 있다고 한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산수유로 유명한 경북 의성에서 찍었다고 해서 영화에 당연 산수유 열매 잼이 등장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외갓집이 있는 파주는 콩이 유명해서 가을에 수확한 콩, 산에서 주워온 도토리가 고소한 두부와,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이 되어 겨울 식탁을 쓸쓸하지 않게 해준다.   


   

의성 산수유마을 ©moonee /  우. <리틀 포레스트> 속 장면 (출처 : 다음 영화)
의성 산수유마을에서 만난 개나리와 마늘밭 ©moonee
의성 산수유마을 ©moonee
의성 산수유마을에서 만난 산수유 꽃 ©moonee



화면보다 훨씬 아담한 공간  

파주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사실 <리틀 포레스트>는 경상북도 의성과 군위를 배경으로 한다. 우린 우선 의성에 있는 산수유마을에 갔다.  산수유 축제 기간이라 주차장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고 주차관리를 하는 사람들도 서 있었다. 행사가 이미 끝났는지 광대 분장을 아직 지우지 않은 아저씨가 길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고, 천막과 플라스틱 테이블들이 비어있었다. 나는 지방에서 ‘00 축제, 00 공연, 전통놀이대회 등 각종 부대 행사’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노점상을 열고, 트로트를 틀어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드는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때마침 잘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축제를 보고 나온 듯한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이었다. 온화한 봄의 햇빛이 노란 산수유꽃과 연둣빛 마늘밭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주인공 혜원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길에 석양까지 더해진 풍경. 이곳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더 가면 군위군 우보면에 혜원의 집이 있다.   



   

<리플 포레스트> 영화 속 장면 (출처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의 집 ©moonee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의 집과 집 앞 구천 ©moonee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의 집 ©moonee



70년 된 빈 집을 빌려 찍었다고 하는데 혜원의 집은 다시 빈 집이 되어 있다. 어쩜 이렇게 좋은 위치에 집이 있을까, 또 이곳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앞에는 ‘구천’이라고 하는 낙동강의 지류인 하천이 흐른다. 이 하천에서 혜원과 재하(류준열 분)가 다슬기를 땄다. 주변 풍경과 집이 실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가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신기했다. 화면에서 느껴진 것보다는 훨씬 더 아담한 공간.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거나, 관광객이 많이 다녀간 흔적은 없어 보였다. 촬영 소품으로 쓰였던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혜원이 사용한 냉장고도 그대로. 이토록 현실감 있는 모습을 마주하니 ‘여기서 살아보고 싶은데?’ 꿈이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 구글 지도에 '혜원의 집' 옛 모습(2015년 사진)이 남아 있어요.

   무엇이 변했는지 비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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