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퍼드 교정에서
당분간은 학교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이지만, 연고도 없는 스탠퍼드대학교에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인상 깊게 본 두 편의 작품 때문이었다.
(* 소설 '본격소설'과 영화 '동탁적니'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난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 이후로도 다른 몇 편의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긴 했지만 본격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잠을 못 이루거나, 읽은 후 며칠 동안 마음이 내려앉아 힘들었던 경험은 없다.
그래서인지 작년부터 소설에 언급된 여러 도시를 순례하며 이야기를 되짚어 보고만 있다.
상 관 없 습 니 다 도 서 관 에 가 있 겠 습 니 다
소설은 12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가 문예잡지 편집자 유스케로부터 전해 들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루이자와에 있는 친구의 별장에 놀러 간 편집자 유스케는 길을 잃어, 근처 마을인 오이와케의 한 낡은 별장에 신세를 지게 된다.
그곳에서 가정부 후미코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가 일했던 사이구사 가(家)의 기나긴 역사와 사이구사 가의 둘째 딸 요코, 옆집에 세 들어 살던 미천했던 아즈마 다로의 사랑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사랑이야기를 들은 유스케는 일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다.
유스케가 아즈마 다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미나에를 찾아간 곳은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스탠퍼드대학교.
소설 속 미나에는 스탠퍼드에서 일본문학 세미나를 맡고 있었는데, 실제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 역시 스탠퍼드에서 강의를 했었다.
이 설정이 본격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점. 어디서부터가 사실인지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의 경계가 매우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다.
유스케가 미나에의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잡지를 읽으며 기다리겠다고 한 도서관은 스탠퍼드의 후버 도서관.
- 네, 그렇지만 세미나를 세 시간이나 하는데요.
- 상관없습니다. 도서관에 가 있겠습니다. 저는 가끔 후버 라이브러리에서 잡지를 읽거든요.
후버 라이브러리는 동아시아 관계 장서 전문 도서관이다.
- p.148 '본격소설' 상 (미즈무라 미나에)
후버는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이다. 스탠퍼드 출신인 그가 1919년에 설립한 후버 도서관. 후버 대통령은 중국에 거주한 적도 있어 중국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동아시아 관계' 서적이 많다는 이야기에 납득이 간다.
유스케는 비 내리는 날에 (또 강의가 있던 날이었으니 아마도 주중이었을 것이다) 방문했지만 내가 찾아갔을 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의 토요일 오후였다.
캠퍼스에 나와 공놀이를 즐기는 가족들이 있었고, 친구끼리 혹은 교수의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나른한 봄날의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철학대 느낌을 한껏 풍기는 건물과, 야자수가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메인쿼드를 지나 후버 도서관에 다다랐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다.
제 꿈 은 스 탄 푸 에 가 는 것 입 니 다
내부는 등록 절차를 밟아야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시간상 돌아보진 못하였다. 유스케처럼 한국 잡지를 읽곤 '한국이 멀어졌어요'란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물론 여행의 첫날 방문하여 이런 멘트는 매우 허풍이겠지만)
스탠퍼드를 가보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최근 인상 깊게 본 한 편의 중국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 '동탁적니'는 풋풋한 첫사랑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인데, 여주인공 샤오즈가 남주인공 린이의 학교에 전학을 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샤오즈는 자기소개에서 '제 꿈은 스탠퍼드(스탄푸)에 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둘은 빠른 속도로 함께 성장하고, 만만치 않은 현실적 난관을 하나 둘 만나게 된다. 결국 남주인공 린이 만을 미국으로 보내고 샤오즈는 꿈에 그리던 미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난 미국에 못 갔어도 매일 같이 지도를 보고 또 봤어.
네가 살았던 모든 집이 남향이었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집은 작은 정원을 가진 LA의 집. 그 집에서 네가 사준 치마를 입는 상상을 했어.
그 이후로 이사한 집들은 모두 그것만 못해.
우린 현실에 지고 만 거야. 그러니까 린이, 우리 누구도 탓하지 말자.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길 간절히 기대했던 미국 서부의 풍경은 영화 속 배경에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묘사한 풍경들을 스탠퍼드 주변 마을 팔로알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팔로알토는 우리나라 대학가 특유의 번잡스러운 풍경이 전혀 없었고 조용한 주택가였다. 집마다 크고 작은 정원이 딸려있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햇빛이 좋아 보이는.
기차 시간이 맞지 않아 마을 구경도 하고 팔로알토 역에 앉아 시간을 보냈는데 미국 여행의 시작부터 좋은 기억을 얻게 되었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역 안엔 너 다섯 명의 남녀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스무고개와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생김새는 동양인의 얼굴이었지만 모두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유학생일까 이민자들일까 궁금해하며,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렸다. 언젠가 저들도 이 시간을 나만큼이나 그리워하겠지.
기차가 도착할 때쯤엔 주홍색을 내는 햇빛이 하늘을 선 긋고 있었다.
INFORMATION
가는 법 : 칼트레인 (caltrain)을 타고 팔로알토 (palo alto) 역에서 내려 스탠퍼드 캠퍼스 안을 순회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
http://www.caltra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