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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Sep 10. 2016

네 북장단 듣고 네가 온 줄 알았어

영화 '서편제' 따라 청산도를 걷다




장사하시는 분이 돈을 받으려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내야 하는 여행자만 다급하다.


근무 중 잠깐 나와 차를 태워 주시는 분도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차를 빌려 탄 여행자가 그분의 시간을 너무 빼앗을까 안달이 난다.


길 가다 만난 동네 사람들의 대화가 끝이 나질 않는다. 오히려 저렇게 이야기하다 배를 못 타실까 여행자만 걱정이다.



슬로 시티 청산.

그곳에서 만난 느림의 삶과 사람들.



나는 청산도에서도 여전히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질 못 했지만, 그곳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청산도로 내려가는 길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보았다. 1993년도 영화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영상이 촌스럽다는 느낌도 전혀 없다. 기술의 발달은 스토리텔링의 힘을 압도하지 못하는 듯하다.


영화는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일정한 수입도 없이 떠돌면서 살아가는 소리꾼 유봉, 그리고 그 소리를 물려주고자 데리고 다니는 남매 송화와 동호의 삶을 이야기한다. 유봉은 송화가 한이 맺힌 소리를 내게 하려고 눈까지 멀게 한다.





영 화 역 사 상  가 장  아 름 다 운  명 장 면

곧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아버지 유봉의 자존감, 고단한 가난의 연속이 영화를 보는 사람마저 내내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논두렁을 걷던 유봉, 송화, 동호가 흥이 나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이 장면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따뜻한 햇살, 다랭이논,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진 논길이 아리랑 장단과 어우러졌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긴장을 다 풀어헤치고 즐길 수 있던 순간이었다.



▲ 자전거 여행자의 특권. 절경이 펼쳐지면 어디든 내려서 바라볼 수 있다. 양지에 있다 하여, 양지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청산도에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서편제 촬영지로 향하기로 했다. 청산도에 머무는 1박 2일 동안 하루는 온전히 섬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어 자전거를 대여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서편제 촬영지로 가려면, 대선산과 보적산 사이 고개(라고만은 할 수 없는 꽤 가파른)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그곳은 일반 자전거로 넘긴 버겁다. 



전기자전거를 빌려보았다. 전기가 많은 도움을 주어 힘을 덜 들이고 넘을 수 있었다. 또 자전거 여행은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게 해주었다. 그리곤 가는 길 내내 풍경이 아름다워 자주 내리다 보니 전기가 금방 닳아버렸다. 전기가 닮아버린 전기자전거는 성가신 고철덩어리가 되어 돌아오는 고갯길에선 힘겹게 페달을 밟아야 했다. 허벅지와 허리가 닳아 버리는 줄 알았다. 








청산도에서 묶은 숙소는 폐교를 개조하여 만든 ‘느린 섬 여행학교’. 원래 청산동 중학교였던 건물은 리모델링하여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옥상에 5채의 예쁜 건물들을 올려 각각 4인실 방을 운영하고 있다. 미술실, 문학실, 영화실, 음악실, 사진실. 방 이름도 아날로그적 감성이 충만했다.




 



서편제 촬영지에 도착하여, 안내 표지판을 읽어보니 바로 이곳에서 내 머릿속 가장 기억에 남는 그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으로 꼽히는 5분 30초에 걸친 롱 테이크가 촬영된 곳. 원래 그렇게 길게 찍을 계획은 아니었으나 감독이 장소가 너무 좋아 바꿨다는 곳. 

푸른 바다, 푸른 산, 그리고 황톳길이 어우러진 곳.

- 안내판 내용 중  





이런 풍경이라면 저절로 흥이나 아리랑 장단을 흥얼거릴 수 있을 듯하다. 살아가면서 일상에 지쳐 있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흥에 취할 만한 기회가 별로 없지 않은가.    






임권택 감독이 이곳에서 5분이 넘는 장면을 영화에 담은 것은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도심의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조금이나마 어깨의 짐을 내려놓아 보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청산도를 봄, 유채꽃이 만개할 때 방문한다. 유채꽃이 만발할 땐 완도에서 청산도 들어가는 배를 타는 데도 꽤 줄을 서야 한다고……. 

 

궁금한 마음에 청산도에 사시는 분에게 “청산도는 확실히 봄이 좋은지?” 묻자, "봄에는 외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차를 끌고 나가지도 못해요. 또 청산도는 항상 아름답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제야 봄에 방문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던 여행자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동시에 괜한 욕심이 부끄러워졌다. 가을의 파란 하늘 아래 완연한 햇빛을 받은 들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데도 말이다. 다시 살펴보니 '서편제'의 그 장면 역시 비슷한 계절에 촬영된 것 같다.  





한 을  쌓 는  일 이  살 아 가 는  일

추수가 끝난 가을이라 다랭이논이 민둥 했지만, 그곳에 다시 구멍을 내고 마늘 알이 한 알 한 알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청산도의 논은 쉴 틈이 없다고 한다. 벼 수확이 끝나면 보리, 마늘, 양파 등을 심는다. 척박한 섬. 그곳의 느림의 삶. 그 여유는 바로 이렇게 쉼 없이 일해주는 땅이 있기 때문일까?



섬을 걷다 보면 구들장논과 다랭이논을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다랭이논이야 계단식 논으로, 다른 산간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구들장논은 청산도만의 특색이다. 2013년 국가 중요 농업유산 1호로 지정된 구들장논은 온돌과 논이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갈을 가장 밑에 깔아 물이 잘 빠지도록 하고, 그 위에 구들장, 다시 그 위에 흙을 쌓아 만든 논이다. 흙과 물이 부족하여 고안된 논의 형태라고 하며, 16-17세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땅은 물과 흙이 부족한 척박한 섬 환경을 보완하기 위한 섬사람들의 지혜 그 자체인 셈이다.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동호가 살았던 초가집 세트장은 진도아리랑 장면을 촬영한 곳에서 도보로 10~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지, 손길이 닿은 지 꽤 되어 보였다. 동호의 북은 북북 찢어져 있었고, 소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다시 완도로 향하는 배에 오르려고 택시를 타려는데, 고마운 현지분이 차를 태워 주셨다. 덕분에 청산도의 이야기를 듬뿍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이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청산도에는 초등학교가 4개나 있었지만 지금은 1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가 각각 한 개씩 남았다. 북적북적했던 곳이 서서히 한산해진다는 것, 하나 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떠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어깨를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곳에 지내는 나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도청항에 도착. 차를 태워 주신 분은 나름 업무 중에 나오셨으니 바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항구에서 만난 지인 아주머니와 또 한참 수다 삼매경.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


“어제 배로 짐을 하나 보낼 것이 있는데 손님이 와가지고 화장실에 화장지가 부족하다 길래 가져다주려니까, 예쁘게 화장지 좀 가져달라면 좀 좋냐… 아주 싸가지가 없어서 신경질을 잔뜩 부리기에… 그 x를 xxx xxxx (삐 —— 자체 검열합니다.) 욕을 한바탕 하니 배가 저 먼치 가버리는 거야…”



전날 배편으로 짐을 하나 부치셔야 했는데 욕을 하다가, 못 부쳐서 오늘 다시 부치신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웃었는지.


참 신기한 것이 욕인데 상스럽지 않았다. 살가웠다.  


 


살아가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여.

- 영화 '서편제' 中



한을 쌓아 두지 않고 구수한 욕으로 풀어내 버리는 청산도의 아주머니와, 느린 섬을 뒤로했다.






INFORMATION

느린섬 여행 학교

- 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양중리 372

- 가는 법: 청산도 도청항에 배가 들어올 때마다 버스가 있다. 기사 아저씨에게 ‘느린 섬 학교’에 간다고 하면 내릴 때 말해준다. 

- 홈페이지: http://www.slowfoodtri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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